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전남 보성군 가볼만한 곳 : 송재 서재필선생 기념공원 (드론 영상)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3. 7. 7.
728x90
반응형

송재 서재필선생 기념공원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성역이다. 

선생의 호는 송재, 본관은 달성이며, 미국식 이름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다. 1864년 1월 7일 외가인 보성에서 부친 서광언, 모친 성주이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때 상경하여 양외숙인 김성근의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1882년 급제하고 교서관 부정자 벼슬에 올랐다.

1883년 일본 동경의 육균 호산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갑신개혁을 주도하여 병조참판 겸 정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로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 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 죽는 참변을 겪었다. 선생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대학에서 의학을 공부,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1895년 조국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898년 국내 수구파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한인회의 개최 및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 구미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그 후 성요셉병원 등에서 임상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다 1947년 미군정의 최고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린 시국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5일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1994년 미국에 모셔진 유해는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1991년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시작하여 2003년 준공하였다.

 

 

서재필 기념공원은 선생의 생전의 위업을 기리고자 1992년 사업을 시작하여 사당건립, 송재로 개설, 독립문 건립을 통해 유적지로 면모를 갖추었으며 조각공원과 유물전시관, 그리고 생가 등이 복원되면서 명실상부한 기념공원이 되었다. 특히 유물전시관에는 서재필 선생 생전의 유품을 800여 점 전시하고 있으며 기녀뫈에서는 선생의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독립문

산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독립문은 독립협회가 서재필 제안으로 우리나라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웠다.

서재필 선생이 프랑스 개선문을 모형으로 스케치 한 것을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하였다. 공역은 건축기사 심의석이 담당하였고 노역은 주로 중국인 누무자들을 고용하였으며 1896년 11월 21일 기공식을 갖고 1897년 11월 20일 준공하였다. 

재표는 화강암으로 사용하였고 중앙에 홍예문이 있으며 왼쪽 내부에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고 독립문 앞에는 영은문의 주초였던 두 개의 돌기둥이 있다. 건립 당시 부지면적 2,800㎡, 높이 14.2m, 넓이 11.48m 이었으며 총 공사비는 3,825원이 소요되었는데 전 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충당하였다. 

독립문의 태극기는 1949년 10월 15일 공포된 현재의 태극기 이전의 것으로 독립신문 제호의 태극기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도시계획으로 원래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80m 떨어진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이전하여 복원되었고 서울시청에 보관되어 있던 설계도로 100여년이 지난 1998년 이곳에 또 하나의 독립문을 복원하였다.

 

정문에서 들어서서 2번째 나오는 개화문이다.

개화문은 구한말 개혁을 앞장서서 외치다가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가 되었던 독립운동가 송재 서재필(1864~1951)의 개화 사상을 알리는 의미에서 여초 김응현(1927~2007) 서예가가 쓴 글이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재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의 소원이다.

 

 

정문에 들어서면 서재필 선생의 동상이 서 잇다.

 

왼쪽에는 서재필 선생의 기념관이 있다.

이곳에는 선생의 유물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송재 서재필(1864.1.7~1951.1.5) 선생은 구한말 격동기에서 해방 정국의 격동기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우리 근대사에 역사의 증인으로 살았다. 개항 이후 밀어닥친 외세의 침탈에 맞서 개화의식을 배양해 갑신혁명을 단행한 것을 비롯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독립협회를 통한 자주. 자강의 계몽운동, "제1차 한인회의" 개최와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 한국친우회 결성 및 황동을  통한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 보여준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 등은 그가 일생동안 품어왔던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희생과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또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고국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그는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개척자적인 삶, 독립운동으로 인해 사업이 피페된 이후 62세의 나이에 다시 의학을 공부해 의사의 길을 걷는 만년의 삶, 등은 어떠한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는 불국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서재필 선생은 조선의 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의사였다. 

미국에서 병리학자, 의사, 시인, 소설가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대구이고 자는 윤경, 호는 송재, 쌍경이다. 

일명 "피제손" 필명은 오시아(N.H.Osia),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

 

서재필 선생은 1879년 초시에 합격 이후 1882년(고종 20) 증광시에 급제해 교서관부정자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과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끝났다. 그는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였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각 신문인 "독립신물"을 발간하였고 그해 7월 독립협회를 걸립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들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소개했다.

 

그의 개화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재미 한국인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의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8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하였다.

 

광복 직푸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 과도정부의 고문 역을 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1948년 미국으로 출국하여 1951년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병사하였다.

 

서재필 기념관은 1986년 2월 다른 곳으로 팔릴 위험에 처해 있던 메디아에 있는 서재필 저택을 구입해 서재필기념관으로 만들었다.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1990년 11월 24일 역사적인 개관식을 하였다. 오늘날 서재필기념관은 미국 내 역사적인 사적지로 지정되어 그의 뜻과 정신을 기리고 있다.

서재필 기념공원은 사단법인 송재서재필 기념사업회가 서재필의 숭고한 뜻을 선양하기 위해 1991년 공사를 시작아혀 2003년 준공하였다. 서재필 기념공원은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위치해 있고 서재필기념관, 서재필 동상, 사당, 재실, 조각공원 등이 있으며 1.4km 떨어진 가내마을에는 복원된 서재필 생가가 있다.

 

 

갑신정변

19세기 들어 조선 사회에는 중국과 일본의 발달된 문물과 사상을 받아 들이자는 개화 사상이 등장했다. 임오군란 이 청나나릐 간섭이 심해지자 청으로부터의 독립하고 서양의 기술뿐만 아니라 정치 제도와 사상까지 받아들여 급진적 개혁 추진하고자 하는 정치 세력인 개화파가 생겼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으로 이루어진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주장을 이루고자 하였다. 1884년(갑신년)에 우편업무를 맡아보는 우정국 개국 축하 잔치가 열리는 틈을 타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파들은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사회 제도를 고치기 위한 정책을 발표하는 등 개혁을 시행하였다.

갑신졍변은 성공을 거두는 둣 하였으나 청나라군의 반격을 받게 되고 개화파를 돕기로 했던 일본마져 철수하면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3일 천하"라고도 불린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은 더욱 심해졌고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다툼도 커지게 되었다.

갑신정변이 실로 끝난 이유는 개화사상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과 개혁이 일본의 힘을 빌려 추진하였다는데 있다. 하지만 자주적 근대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독립신문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급받아 1896년 4월 7일 창간하였다. 처음에는 가로22cm, 세로 33cm 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으로 편집하였다.

창간 이듬해인 1897년 1월 5일자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행하였다."독립신문"의 한글 전용은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신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또 "독립신문"은 신문의 중요성을 일반에 널리 인식시켜 그 후에 여러 민간 신문이 창간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신문은 여러가지로 한국 신문사살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길 건너편에는 조각공원과 휴게소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해방되자 미국의 메디아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서재필은 김규식의 노력과 하지(Hodge) 장군의 초청으로 1947년 7월 미군정 수석고문이자 과도정부특별의정관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서재필 선생은 정치, 경제 등 모든 면에서 격동기였던 한국을 위해 직접적인 정치활동보다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계몽운동에 전념했다. 그리고 그는 미소의 냉전으로 분단이 고착화되는 한국의 장래를 염려해 한민족의 통일과 민주적인 새 국가건설을 온 힘을 다했다.

이런 중 한국의 의식있는 주요 인사들에 의해 서재필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잔느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서재필은 아무런 정치적 야심이 없음을 공포하고 오로지 한국이 통일되어 잘 살기를 바란다는 말만 남긴 채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인 1948년 9월 한국을 떠났다.

해방된 한국에서 서재필의 활동은 자주독립 민주국가를 건설하려는 평생 염원이 담겨있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길 8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