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전남 고흥군 재동서원, 서동사 (드론 영상)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3. 12. 6.
728x90
반응형

고흥군 대서면에 있는 서동사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5호이다.

조선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에게 의리를 지킨 서재 송간과 매월당 김시습들을 모신 사당이다.

송간은 1455년 왕명으로 남쪽 지방을 순시하고 돌아오는 길에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나 영월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영월로 찾아가 단종에게 임무가 끝났음을 알린 뒤 고향인 여산으로 내려갔다.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3년 상을 치른 뒤 통곡하면서 산천을 돌아다니다 삶을 마감했다.

건물은 정조때인 1785년 성균관 유생들로부터 "송간을 배향 할 사당을 세워 달라" 는 통문을 받은 지방 유생들이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세웠다. 송간 외에도 송대립, 송침과 고흥 유씨인 유탁, 영광 정씨인 정운회를 함께 모셨다. 

9년뒤 단독 건물을 마련하고 여산 송씨 후손들을 잇달아 배향하면서 육충사, 세충사 등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다가 현종 때인 1846년 성균관 통문에 따라 김시습을 배향하고 서동사라고 했다. 고종 때 전국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가 1956년 현재의 자리에 다시 들어섰다.

1980년 경내에 세운 창효사로 효자 네 분의 위패를 옮겨간 후 충신 열한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유물전시관, 칠현신 사적비, 임란공신 추모비 등이 있다.

 

 

 

 

 

 

 

 

 

안내표지석에는 재동서원이라고 되어 있는데 본 건물 앞에는 서동사라고 되어 있다.

 

 

재동서원에 모신분들의 주벽은 송간(1405~1480)이다.

송간은 조선 전기의 충신으로 본관은 여산, 호는 서재, 할아버지는 고려 중랑장 인충이다. 세종, 문종, 단종의 3조를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1455년 왕명으로 남방을 순시하고 돌아오려는데 단종이 영월에 쫓겨 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영월에 가서 복명하고 고향 여한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산 속에 들어가 3년 상을 마치고 흥양 마륜촌 산정에 숨어 지냈다. 10여년 뒤에 가족이 찾아냈으나 항상 술에 만취하여 산천을 돌아다니며 대성통곡하므로 모두들 미쳤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생애를 마쳤는데 지금도 그곳을 서재동이라 한다. 1793년에 충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송대립(1550~1597)은 조선의 무장으로 자는 신백, 본관은 여산, 형조 참판 간의 후손, 흥양 출신이다. 경사에 밝고 무예에  뛰어났다. 1594년(선조27) 임진왜란 중 무과에 급제, 당시 지도 만호로 있던 아우 희립과 함께 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 있다가 도원수 권율 밑으로 옮겼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권율에 의해서 창의별장이 되어 전공을 세우고 흥양에서 많은 의병을 모집, 적을 무찔렀으나 복병을 만나 전사했다. 병조참의에 추증되었고 흥양의 세충사에 제향되었다.

 

 

송심(1590~1637)은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여산, 자는 사윤, 아버지는 창의별장 대립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아버지의 창의별장으로서 많은 의병을 모아 흥양에서 적을 무찌르다가 전사하자 이를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였다. 한때 균전사 권진이 호남의 민전을 감사하기 위해 내려왔을때 그의 용맹성을 보고 대성할 것을 예견하였다. 또한 도사 김시강이 유생들에게 강을 하과할 때 그는 자청하여 병서를 훌륭하게 강하였다.

1614년(광해군6) 무과에 급제, 북변의 수비에 종사하고 돌아온 뒤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수군통제사 구굉의 막료가 되어 그의 천거로 선전관이 되고 이어서 전라도병마우후가 되었다. 1635년에는 홍원현감이 되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북병사 이항, 남병사 서우신 휘하의 척후장으로 남한산성 구원에 나섰다. 그러나 양근에 이르렀을때 이미 강화가 성립되자 중영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며 본국으로 철수하는 청군 소속의 몽고병을 추격, 안변남산역에 이르러 전후영장과 함께 적을 공격, 부족한 병력으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흥양 세충사에 제향하였다.

 

 

송순례(1528~1597)는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여산이며 자는 문백, 간의 현손이다. 선조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1583년(선조16) 아산진을 지킬 때 여진인이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여 동방의 비장군이라 불렸다. 

이 해 이탕개의 침입을 물리쳐 그 공으로 선조로부터 악비의 [정충록]을 하사받고 이산군수가 되었다. 1588년 탐호하다 하여 군수직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뒤 다시 제주목사, 전라도방어사 등을 지냈다. 흥양의 세충사에 제향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충양이다.

 

 

송희립(1553~1623)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여산이며 자는 신중, 간의 6대손이며 대립의 아우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으로서 영남지역에의 원병파견을 주장하였고 지도만호가 되어 형 대립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선조31) 노량해전에서 적에게 포위된 명나라의 제독 진린을 구출하였으며 1601년(선조34) 양산군수, 다대포 첨절제사를 지내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흥양의 세충사에 제향되었다.

 

 

송건(1558~1592)의 자는 사립, 현령 하형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21) 무과에 급제하여 북변의 군영에 보직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 양사준의 선봉으로 활약한 공으로 성주 판관이 되었다. 그 뒤 함창 싸움에서 적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흥양의 세충사에 제향되었다.

 

 

김시습(1435~1493)은 조선 초기의 학자, 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청한자.동봉.벽산청은 췌세옹, 법호는 설잠, 서울 출생,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웡당집]에 전하는 "상류양앙진정서", 윤춘년의 전기, 이이의 전기. 이자의 서문. 장릉지의 해동명신록, 연려실기술 등이 있다.

 

 

송상보(1564~1597) 일명 상보라고도 한다. 호는 봉재이다. 충강공간의 후손으로 군자감정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행주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당진현감에 제수되었다. 

 

송득운(1570~1633) 조선 선조조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병을 물리치는데 전공을 세워 공신에 녹푼되었다 세충사에 제향되었다.

 

송석융(1614~1733) 본관은 여산이며 송간의 8대손이다. 찰방으로 증직되었다.

 

 

 

송홍연(1569~1629) 여산 순양공 순례의 장손으로 임진왜란때 전라병사로서 진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병신년(1596)에는 전부장으로 이몽학의 난을 홍주에서 평정한 공으로 정란훈에 기록되었다. 이조때 충좌위 좌부장, 전부장, 남해현감, 내금장, 온성판관, 개천군수, 위원군수, 풍천도호부사, 무산첨사, 창주첨사 등을 역임하였다. 후손으로 주한이 있다.

 

송진부(1569~1597) 조선 중기의 무신, 학자, 본관은 여산, 자는 경개, 호는 석계, 아버지는 군자감직장인 상장이며 어머니는 동복오씨로 찰방 익후의 딸이다. 1589년 향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학록에 임명되었으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의 모함을 입어 삭과되었다. 그 뒤 무예를 닦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었다가 얼마 뒤 회령첨사를 지내고 경상병사가 되었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일시 고향에서 휴양하고 있을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각지로 격문을 보내 의병 수만명을 모은 뒤 부사를 지낸 나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이 되어 장성으로 진군하였다. 그 때 적군이 남원성을 포위하고 있어 군량이 부족하므로 여러 군에 격문을 보내 의곡 800여 섬을 얻어 군량을 확보하고 남원성으로 진격하여 적장 7인을 베고 전사하였다. 그 뒤 나라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참판의 증직을 내렸다.

 

 

송명규는 효자로 이름났느며, 고흥의 재동서원에 배향되었다.

 

송찬문은 1980년 고흥 재동서웡의 창효사에 배향되었다.

 

 

 

송정규(1656~1710)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자는 원경, 호는 우수, 참판 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승지 시길이고 아버지는 증이며 어머니는 신득홍의딸이다. 1683년(숙종9)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690년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 당시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 처우문제에 대한 소를 홀렸다.이어 사헌부지평이 되고 1696년 경성판관으로 그 지역을 자 다스려 품계가 오르고 뒤에 승지가 되어 참찬관을 역임하였다. 

1701년에 인현왕후가 죽자 고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708년 강원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절수의 례를 상소하여 강릉, 춘천,낭천 등 3읍의 절수를 폐지하게 되었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문묘 대성전의 현판을 썼다.

 

재동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인 서동사와 창효사가 있으며 강당인 경효재, 동.서재 및 내.외삼문 등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비각과 비석이 있다. 

서원을 구성하는 건물의 배치는 전면에 강학공간, 뒤에는 제향공간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강당인 경효재는 서원 경내의 동북쪽, 동.서재와 분리된 일곽을 이루는 곳에 위치하여 별도로 낸 양호문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다. 내삼문을 통해 제향공간에 들어서면 서동사와 창효사가 각각 동쪽과 남족에 ㄱ자형으로 서로 직교하여 배치되어 있다.

왼쪽에 있는 건물이 서동사,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재동서원이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유튜브 검색 "리차드박"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동서로 243-51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