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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고흥군 가볼만한 곳 : 분청문화박물관 (드론 영상)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3.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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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슈모의 분청사기 가마터인 사적 제519호 운대리 가마터에 자리 잡은 고흥분청박물관은 찬란하고 유규한 역사를 기록, 보존하고 백토분장의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돋보인 분청도자문화와 우리의 정신문화인 설화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의해 건립되었다.

분청문화박물관은 전시, 교육, 체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지역사회의 문화활동에 기여하고 지역민과 함께하는 박물관이 되고 있다. 

설화의 내용을 조형물로 표현한 야외 분청공원, 수준 높은 문학가들의 문학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조종현, 조정래, 김초혜, 가족문학관 등 다양한 문화시설들을 통해 고흥의 랜드마크로 발돋움할 것이다.

 

고흥군 분청문화박물관은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분청사기 가마터로 국가 지정 문화재 제519호, 전라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된 이곳에 지난 2017년 10월에 건립되었습니다. 문화를 사랑하고 아꼈던 우리 조상들의 삶의 흔적과 손길이 가득한 곳에서 고흥의 역사를 보존하고 백토분장의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돋보인 분청도자문화와 우리의 정신문화인 설화문학의 계승,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현재 지상 3층 9,302㎡의 규모로 역사문화실, 분청사기실, 설화문학실 등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특별전시실 등 5개의 전시실에 3,0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찾아주신 관람객분들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기를 바라며 관련된 유물들을 콩해 선조들의 삶과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높게 흥하는 고장, 고흥

우뜩 솟은 팔영산과 수백 개의 섬, 신비롭고 아름다운 천례의 풍광을 품고 수많은 고인돌과 옛무덤, 임진왜란을 막아낸 충절의 고장, 덤벙분청을 꽃피웠던 조선의 수많은 도공들과 물따라 길따라 산따라 이어지는 고흥 사람들의 끝없는 이야기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 가득합니다.

 

고흥에 최초의 사람이 등장하다

고흥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던 시기는 18,000년 전.후기 구석기시대이다.

이들은 주로 동굴이나 바위그늘에 살면서 불을 피우며 먹거리를 찾아 이동생활을 하였다. 

풍양면 한동유적에서는 돌날 등의 뗀석기와 몸돌석기가 발견되면서 돌을 깨트려 만든 석기로 사냥하고 식물 줄기나 열매 들을 채집하며 생활했던 최초 고흥 사람들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풍양면 한동유적은 고흥 - 녹동간 도로 확장공사로 2004년 호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하였다. 조사결과 구석기시대 유물포함층에서 총 1,564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소량의 몸돌과 톱날석기 등의 석기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1만8천여 년 전 후기구석기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발굴 조사된 고흥 지역의 첫 구석기유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외에 풍양 삼각마을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고흥으니 선사시대는 고인돌문화로 대표된다. 2,000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는 우리나라 최대늬 밀집 분포지역으로서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다. 고인돌 안에 부장된 유물을 화려하고 다양하며 당시 지배 계층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류가 확인되었다. 

이 시대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사회로 대규모의 노동력이 동원될 수 있는 혈연공동체사회였다. 특히,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한 정치적인 힘과 경제적인 부를 축적한 지배자가 이 지역에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바닷가에 정착한 사람들

날시가 따뜻해지면서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먹을 것이 풍부한 바닷가나 강가에 모여들게 되었다. 한 곳에서 오랫동안 살 수 있는 움집을 짓고 음식을 저장할 수 있는 토기를 만들어냈으며 농사를 짓기 위한 도구를 제작하는 등 이전 시기보다 혁신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인근 여수나 순천지역의 발굴조사 상활으로 보아 고흥에서도 이 시기의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청동시시대 발굴유적

고흥 지역에서 최초의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운대 고인돌과 소록도유적이다. 그 후 포두면 장수제 고인돌 조사(1984)를 시작으로 고흥 - 벌교 간(1998~1999)과 고흥 - 녹동 간(2004) 확포장공사 당시 많은 유적이 조사되었다.

최근까지 223기의 고인돌과 집터가 발굴되었으며 특히, 마을의 방어 시설인 환호유적도 함께 조사되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고인돌 최대 밀집 지역, 고흥

고흥은 고인돌 최대 밀집 지역으로 194개군 2,244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현재 4개의 고인돌군이 전남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며 12개소 223기가 발굴조사 되었다. 이 지역 고인돌은 구릉에 많이 위치하고 있으며 개석식과 기반식 유형의 고인돌이 확인된다. 또한 대형의 기반식 고인돌이 성행하였으며 입석형 고인돌이나 고인돌 내 입석이 세워진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규모 공동체 마을을 이루고 살다.

고흥에 대규모 마을이 출현한 시기는 기원전 후로 더덕면 신양유적을 통해 알 수 있다. 마을은 대부분 외부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비교적 완만한 구릉에 형성되었다. 생활공간은 장방형 집터의 바닥이 지상으로 올라온 반움집 형태로 내부에 부엌과 구들이 만들어 지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고흥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 54개국 중 초리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도덕면 신양유적은 철기시대에 형성된 마을 유적읻. 발견된 집터는 85기로 평면형태는 원형계와 방형계가 함께 나타난다. 집터 내부에서는 벽 도랑, 기둥구멍, 불피운 흔적 등과 10cm 내외의 토기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주거지 형태와 출토유물의 특징을 통해 볼 때 이 유적은 2~3세기 전남 동부지역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풍양면 한동유적에서는 삼국시대 집터 36기, 수혈 3기 등이 조사되었다. 낮은 구릉 사면에 위치한 집터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방형계이다. 집터 내부에서는 가야, 신라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굽다리 접시 편과 영산강 유역 및 일본 키나이 지역 일부에서 확인되는 아궁이 틀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유적은 고흥지역과 국내외 지역 간 교류 관계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유적이다.

풍양면 방사유적에서는 삼국시대 집터 63기와 수혈 2기 등이 조사되었다. 낮은 구을 사면에 분포한 집터의 평면 형태는 대부분 방헝계이다. 집터 내부에서는 벽 도랑, 기둥구멍, 부뚜막이 확인되었다. 가야계, 백제계 토기는 물론 일본에서 주로 확인되는 딸린 굽은 옥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볼 깨 이 유적은 고흥지역 취락과 국내외 지역간 교류관계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유적이다.

 

 

활발한 대외교류를 펼치다.

고흥을 중심으로 한 백제, 가야, 중국, 왜 등과의 본격적인 대외교류는 삼국시대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풍양 한동유적과 방사유적에서 출토된 백제계 토기와 가야계 토기,  일본과 관련된 다양한 외래 유물을 통해 볼 때 이들 지역이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거점 지역이었음ㅇ르 알 수 있다.

또한 이시기의 고흥에는 조조례현(남양면), 두힐현(두원면), 비사현(동강면)을 비롯한 백제 치소와 남양리산성, 백치성 등 백제 성곽이 전략적 유충지에 세워졌다.

 

 

마한의 전통을 이은 고흥의 토광묘

고인돌 축조 이후 고흥에는 토광묘라고 하는 새로운 무덤이 축조된다.

최근 동강면 한천리 신촌유적과 장덕유적에서 삼국시대 토광묘 23기가 확인되었다. 토광묘는 마한, 백제계의 전통에 따라 축조되었으며 내부에서 호형토기, 고배, 수평구연호 등 다수의 가야계 유물도 확인되었다. 

당시 고흥반도와 내륙을 연결하였던 이 지역은 마한, 백제, 가야 지역과 활발한 교류관계를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흔 길두리 안동고분은 2006년 전남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였다. 분구가 직경 34m, 높이 5m 이며 수혈식 대형 석곽(돌덧널)이 분구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석곽의 크기는 길이 320cm, 너비 150cm(동) ~ 130cm(서) 높이 160cm로 평면 사다리꼴이다. 내부에서 금동관모, 금동신발, 투구, 갑옷, 살포, 환두도, 동경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을 분석한 결과 마한, 백제, 왜 와의 다양한 문화교류 양상이 확인되었다. 

안동고분 축조 당시 고흥은 남해안 연안항로의 길목으로서 확발한 대외교류를 전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흥 야막고분(전남문화재자료 제218호)은 직경 22m, 높이 2m 내외의 대형고분으로 주 매장시설은 석곽(돌덧널)형태이다. 돌로 벽을 정연하게 쌓지 않고 폭 1m 내외의 돌을 채워 넣어 벽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주로 일본 북구주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는 방식이다.

출토유물은 대금식판갑과 투구, 철도, 철모, 철촉 등의 무기류와 철서, 철착, 족집개 등의 공구류, 동경, 옥, 수즐과 같은 장신구류 등이 다량 확인되었다. 이 유물들은 일본 고분시대 중기의 유물들과 직접 비교가 가능한 유물로 당시 전남 서남부 지역과 왜와의 교류양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전남 동부지역에서 확인된 백제산성은 10여 개소이며 이 가운데 고흥 지역에 한동리산성, 남양리산성, 백치성, 독치성 등 4개의 산성이 위치한다. 

고흔 지역 백제산성은 전남 동부지역과 양상이 비슷하며 낮은 산에 소규모로 축성되었다. 대부분 석재로 축조되었으며 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계곡 방향으로 성벽이 세워졌다. 이로 보아 고흥 지역 산성은 길목을 차단하고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는 방어 거점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미술의 보고 고흥

고흥의 불교미술이 융성했던 시기는 조선 후기로 사찰이 가장 왕성하게 재건되었다. 특히, 능가사는 화엄사와 송광사에 버금가는 불교 교단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그 배경에는 승려 조직의 대대적인 후원과 제작 지원이 잇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당시 색난으로 대표되는 승려 장인(승장)들이 명망 높은 이들의 후원을 받아 고흥의 불사를 주도하면서 불교미술은 찬한하게 꽃을 피우게 된다. 

그들이 남긴 문화재들은 제작자와 조성시기 등을 기록한 발원문이 함께 발견되면서 오늘날 고흥 지역 불교문화의 양상과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금탑사 괘불탱

괘불이란 법당 밖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거행할 때 걸어 놓는 탱화를 말한다. 금탑사 괘불은 사천왕을 비롯하여 일반적인 설법회상에 등장하는 인물이 대거 생략되고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의 삼불과 협시보살만으로 간략화된 구도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괘불은 야외에 걸리는 특성 때문에 가로 폭이 좁고 세로가 긴 화면인데 금탑사 괘불은 가로로 확장된 구도이다.  이는 전국적으로 유일한 사례이다.

괘불의 화승은 18세기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화승인 비현과 그의 제자인 쾌윤이다. 이들은 18세기 선암사를 거점으로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했으며 여수 흥국사, 영광 불갑사, 화순 만연사, 곡성 태안사 등지의 불화를 조성하였다.

 

고흥의 불교문화재

현존하는 고려시대 불교문화재로 풍양 상림리 삼층석탑(전남문화재자료 제184호), 무술명동종, 두원 용산리 석조보살좌상(전남유형문화재 제158호)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불교문화재는 능가사 대웅전(보물 1307호), 능가사 동종(보물 1557호), 금탑사 괘탱불(보물 1344호)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불교문화재는 김애립이 조성한 능가사 동종을 제외하면 모두 승장(승려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다.

현재 고흥의 전통 사찰로는 능가사, 금탑사, 봉래사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수도암, 송광암 등이 있다.

 

고흥의 승장

조선시대에는 승려들이 사찰에서 필요한 불상, 불화 등 성물을 직접 제작하게 되면서 점차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한 승려인 승장이 등장하였다. 

승장은 전문 분야에 따라 불화승, 조각승, 주조장 등으로 나누어 졌으며, 유파를 이루어 일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다은 승장 유파와 교유하며 협업하거나 먼 지역에 초빙되어 불사를 추진하였다. 고흥의 승장은 능가사 응진전 불상을 조성한 색난을 비롯하여 희장, 삼인, 녹원, 보해, 범종, 하천 등이 있으며 이들은 불교문화재 뿐만 아니라 관아 건축에도 참여하였다.

 

위의 사진들은 덤벙분청사기 제작과정들이다. 

 

부드러운 백토 분장의 덤벙분청사기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단계의 제작 과정이 필요하다. 분청사기를 만들기에 적합한 흙을 얻기 위한 수비 과정과 흙 속의기포를 제거하기 위한 반죽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레에서 그릇을 성형하고 여러 가지 기법을 이용해 무늬를 장식하게 되는데 덤벙분청사기의 경우는 백토 물에 덤벙 담가 꺼내는 방법으로 그릇의 표면을 장식하게 된다.

초벌구이 된 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시유 과정과 재벌 단계를 거치면 비로소 덤벙분청사기가 완선된다.

 

운대리 분청사기의 과학기술

운대리 분청사기는 철분 2~5%를 함유한 퇴적 점토를 사용하였고 매우 높은 온도인 1,200℃ 이상까지 나무를 연소시키는 재벌구이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 졌다.

유약의 경우는 식물의 재를 사용한 회유 계통의 유약 기술을 그대로 사용 하고 있으며 발현된 분청사기의 색상은 가마에서 굽는 분위기에 따라 다양하게 관찰된다.

운대리 분청사기에서 확인된 상감, 인화, 귀얄, 덤벙 등 시문기법별 기술의 변화는 관찰되지 않고 태토, 유약, 굽는 분위기에 의해 과학기술적 변화가 확인되고 있다.

 

 

 

 

조선시대 흥양을 거쳐 지금의 고흥이 되다.

조선 초기까지 고흥현을 비롯하여 고흥에는 7개의 현이 있었다. 세종 23년 (1441)에 고흥현의 치소를 봉황산 서쪽(현 고흥읍,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원현으로 기록)으로 옮기고 고흥현과 남양현, 태강현 등을 합쳐 흥양현으로 명칭하였다. 흥양현은 고흥의 "흥"자와 남양의 "양"자를 따서 붙여진 명칭으로 현재와 유사한 영역이 관할 구역으로 편성되었다.

흥양현은 전라좌수군의 1관 4포가 위치해 있는 해상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 후기 고종때(1895)에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흥양현은 흥양군으로 개편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흥양군에서 고흥군으로 바뀌었다.

광복 이후 고흥군은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22개 시군의 하나로 새롭게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가 발사되었다.

 

 

고흥의 충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눈부신 승리 뒤에는 고흥(흥양) 수군의 뒷받침이 있었다. 이순신의 본대인 전라좌수군의 주력은 고흥 수군진(1관 4포) 소속 군사들로 고흥 출신 군관과 고흥 수군진의 지휘관들은 선봉에서 해전을 이끌었다. 

이러한 고흔 수군의 무훈은 [난중일기]와 [이충무공전서], [호남절의록]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수군과 함께 고흥에서 활동한 송대립, 신군안, 의능 등 의병들은 이순신에게 군량미를 보급해 주거나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전후에도 이대원, 송순례, 송심, 송홍연, 진후평, 진필한, 진계립 등 고흥 관련 무장들이 많은 전공을 세우면서 나라를 지켰다.

 

전라좌수군의 중심 전력 1관 4포

흥양현(고흥)은 여말선초에 왜구가 창궐하면서 연해 방어 거점으로서 부각되었다. 이곳은 삼면이 바다로 왜구의 침입이 용이하면서도 방어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례로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군이 관할하는  5관 5포 가운데 1관 4포가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다.전라좌수군은 5관 5포 소속 군사들로 조직되었는데 이 가운데 고흥에 1관 4포가 소재한 점은 고흥 수군이 전라좌수군의 전력에서 매우 중요했다는 것ㅇ르 의미한다. 실제로 1관 4포의 군사 지휘관인 흥양현감, 사도첨사, 녹도만호, 여도만호, 발포만호는 임진왜란 동안 이순신의 참모로 크게 활약하였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선조 13년(1580) 9월에 발포만호로 부임하면서 처음 수군직으로 근무하였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당시 수군지휘관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발포만호 시절의 수군직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임진왜란 해전을 주도한 고흥 수군 장수들

임진왜란 첫 번째 해전은 1592년 5월에 일어난 옥포해전으로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일본에게 거둔 첫 승리의 전투였다.

일본 수군과 처음 맞부딪힌 경상도 수군은 전라좌수영에 구원 요청을 하였다. 당시 국방체제는 제승방략제라 하여 각 거점 지역에서 적을 막는 체제였다. 이때 고뇌하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고흥의 녹도만호 정운과 고흥 출신 군관 송희립은 적극적인 출전을 주장하였다. 전라좌수군의 첫 출전(옥포, 합포, 적진포해전)을 이끌어낸 고흥 수군 장수들은 선봉으로 나서 적함 12척을 격침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조선 수군의 재건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였지만 일본군과의 다음 전투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기에 수군 재건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흥양현감 최희량이 쓴[임란첩고서목]에는 새로이 건조한 전선과 집물 목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흥야현이 당시 물자 공급에 큰 기여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쯤 고흥(흥양현)에 일본군이 끊임없이 침략하였으나 흥양현감 최희량과 송대립 등 의병들이 이를 막아내면서 수군 재건의 사명이 완수횔 수 있었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 직후 전선이 13척에서 60~70척으로 늘어났으며 병력도 1,000명에서 7,300명으로 증강되었다.

 

 

 

절이도 해전

1598년 7월 고하도와 고금도에서 조선 수군이 재건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을때 진린 도독이 거느린 명나라 수군이 조선 구군에 합류하면서 조명연합수군 작전이 시작되었다. 조명연합수군의 첫 전투는 동월  (19일로 추정) 절이도(현 고흥군 금산면)에서 적선 100여 척을 맞아 승리한 절이도해전이었다.

절이도해전을 시작으로 조명연합수군은 순천 예교성과 노량해전에서 순차적으로 승리하여 7년 간의 임진왜란을 종식시켰다. 무엇보다 절이도해전은 명량해전 이후 조선의 수군 재건 성과를 확인시켜 주었으며 해상의 제해권을 다시 찾는 전투로서 그 의의가 크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고흥 출신 인물들

임진왜란 해전에 참가한 흥양 출신 인물들로 김봉만, 박은춘, 송대립, 송덕일, 송희립, 신여량, 정걸, 진무성, 신군안, 송제 등이 있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신 선조를 호종하거나 의병과 군사로 종사하면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특히 이순신의 예하 인물로 해상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웟다.

이들과 관련된 문화재로 현재 재동서원(전남문화재자료 제155호), 무열사(전남기념물 제58호), 신여량 정려(전남기념물 제111호), 송씨쌍충정려(전남기념물 110호), 송씨쌍충일렬각(전남기념물 제74호)등이 전해진다.

 

 

고흥군 운대리는 분청사기의 중심에 서다

고흥 운대리에는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가마터 30여 기 이상이 밀집 분포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생산되는 분청사기는 자유분방함과 활달함, 파격적인 아름다움 등으로 인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던 곳이다. 특히 백토 물에 덤벙 담가 꺼낸 듯한 덤벙분청사기의 부드러운 아름다움은 백토분장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운대리 가마터는 1980년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졌으며 이후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학술적, 역사적 가치의 중요성이 널리 인정되어 전라남도 기념물 제80호와 국가사적 제51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고흥 운대리 일대에는 분청사기 가마터 25기가 분포되어 있다. 그중에서 1호, 2호, 7호, 14호, 15호 등은 학술적인 성격 규명을 위해 발굴조사 되었다.

조사결가 밝혀진 운대리 요지의 구조는 단실 불기둥 등요로서 번조실 안에 불기둥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아궁이는 깊으며 굴뚝부는 초벌칸에서 일단 턱이 지면서 연기가 외부로 빠져나간 구조로 확인되었다. 측면에 출입시설이 있고 가마 바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약간 낮은 단이 있다.

출토유물은 대접, 접시, 잔, 병, 편병, 항아리, 단지, 장군, 벼루, 고족배, 제기 등으로 대접과 접시가 주류인 것으로 보아 일상생활용 그릇을 주로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사기의 장식기법은 상감, 인화, 조화, 철화, 박지, 귀얄, 덤벙기법 등 7가지 모든 기법이 확인되어 분청사기 출현에서부터 쇠퇴에 이르는 모든 제작 과정과 시술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 7호와 14호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덤벙분청사기는 운대리 분청사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릇이라 할 수 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사이의 분청사기

분청사기는 청자와 같은 회청색 태토에 백토를 입혀서 문양을 장식한 도자기로 고려시대 청자의 뒤를 이어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의 약 150년간 만들어졌다.

1941년에 우현 고유섭(1905~1944)선생이 "분장회청사기"라고 처음 사용하였고 이후 "분청사기"라는 줄임말이 되었다. 백토분장을 바탕으로 한 분청사기의 여러 가지 장식 기법은 정밀함과 자유분방함이라는 상반된 개성을 표출하여 청자, 백자와 구별되는 한국적인 미감을 만들었다.

최초의 분청사기는 백토로 문양을 나타내는 백상감기법이 발전되었고 이후 제작자가 전국적으로 확장되면서 독특한 지역 특색이 나타났다. 인화상감기법의 분천사기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고르게 분포한 반면 철화분청사기는 충청도 공주 지역에서, 조화분청사기는 전라도 지역에서 주로 제작되었다.

 

한국인의 고유한 미감 계승

분청사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고 자기 또한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하는 시기에 이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양식을 갖추고 약 15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존재하였다.

정밀하게 시문된 인화문의 드러내는 질서와 균형의 미감은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해 제도의 정비에 국력을 집중한 참신한 시대상과 잘 부합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장인들의 개성의 투영된 철화분청사기와 조화분청사기의 예술성은 현대 도예에서 재현과 해석이 지속되어 분청사기가 한국인의 고유한 미감을 간직한 전통문화예술임을 잘 보여준다.

더하여 덤벙분장으로 그릇 전체를 하얗게 만든 운대리 분청사기는 백자의 영향으로 마침내 소멸하기 직전에 피워낸 분청사기의 마지막 향기이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저의 유튜브를 방문하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분청문화박물관길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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