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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보성군 가볼만한 곳 : 홍암 나철 생가 (드론 영상)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3.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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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창시자이자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한 나철(나인영)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나철(1863~1916)은 을사늑약 소식이 알려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여러 차례 일본에 건너가 국권 수호를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교섭에 한계를 느껴 1907년 비밀 결사 자신회를 결성하여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하다 신안군 지도에 유배되었다.

 

 

앞쪽에 있는 건물이다. 

 

뒤쪽에 있는 건물이다.

 

나철은 단군신앙을 부흥시켜 1910년 대종교라 일컫고 국학운동과 항일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결술국치 이후에는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옮겨 항일투쟁의 본거지를 마련하였다. 

1915년 다시 국내로 돌아와 대종교 부흥운동을 지속하다, 1916년 9월 12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일제의 무단적 종교 정책에 항거하여 자결하였다.

 

홍암 나철 선생은 29세 때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이수 승정원가주서와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역임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지사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하였다.

을사조역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하라" 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히로부미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발표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1906년 다시 한 번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이토히로부미와 대립관계에 있던 오카모토, 도야마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또한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창보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동시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 등과 함께 평리원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았다.

 

고종의 특사로 그 해에 풀려나서 1908년 다시 일본을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그러나 소득없이 귀국하였다.

이후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 유근, 정훈모, 이기, 김인식, 김춘식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 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날이 바로 중광절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 이라고 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민족의 선각자, 독립운동의 아버지, 국학의 선구자. 홍암 나철 선생의 생애 및 주요업적

 

1863. 12.2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금곡마을) 115번지 출생

1891.          문과에 급제 기거주(승정원 기주서)가 되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됨

1895.          징새귝장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음

1905.          1차 도일하여 일제의 조선침략을 규탄 3일 간 단식농성을 함. 동 사건으로 10년 유형중, 동년 10월에 사면됨.

                   이후 세사와 단절되고 수도에만 전념.

1908.11.      4차 도일하여 일본정계를 수탐함

1909.1.15.  경성 재동 삼간초옥에서, 전래단군신앙인(대종교)를 동광하고 개천절과 어천절을 복원시킴

1911.7.21.   국내와 만주에 있는 단군 유적들을 두루 봉심하고 만주 화룡현 청호에 교당을 설치함.

1914.5.13    대종교총본사를 만주 화룡현 청호에 설치하고 동북아 신교의 중심임을 천명하고 항일독립 투쟁의 본산을

                     마련함

1915.5.10.   일제가 조선 총독부령 83호 종교통제안에 의해 대종교를 불법 항일독립단체로 규정함.

1916.8.15.   우리 민족의 전래 제천의식인 선의식을 복원 봉행함, 같은 날 김교헌에게 도룡(교주직)을 전수하고 54세

                     나이로 자진 열명함. 

1916.8.25.   대종교단에서 대종사(신형)으로 추승됨. 

                     특히, 많은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과 정치, 외교 항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만주지역무장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홍암 나철 선생의 제자이신 서일, 김좌진, 이범석, 이상실 등 주요 독립군 지도자들의 구국 사상에

                     영향을 받아 항일투쟁에 앞장서게 됐다. 또한, 홍암 나철 선생의 국학사상은 주시경, 최현배, 이병기 등이

                      주도한 한글 운동의 중요한 정신적 토대가 되었음은 물론 일제 식민사관에 맞선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의 민족사관 정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916.11.20.   선생의 유언에 의해 백두산 기슭인 중국 연길시 만주 화룡현 청호 언덕에 봉장됨.

1962.              정부에서 건국훈장 수여, 홍암 나철 선생의 자제분이신 나정련, 나정문 이 두분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액화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시고 순국 정부에서 1962년 건국훈장 수여 홍암

                       나철 선생을 민족성인으로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추대하였음

 

민족의 선각자, 독립운동의 아버지, 국학의 선구자. 홍암 나철 선생의 생가에 들렸는데 마당에 잡초가 많이 자라 있었다.

단군교를 창시하고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런 분들이 있음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저의 유튜브를 방문하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전남 보성군 벌교읍 녹색로 51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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