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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보성군 가볼만한 곳 : 홍암 나철 기념관 (드론 영상)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3.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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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아버지, 국학의 선구자, 대종교 중광자, 홍암 나철은 겨레의 큰 스승이다. 홍암 나철성생기념관은 나철이 걸어온 길을 통해 선생의 구국이념과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고자 건립되었다. 선생의 생가와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홍암사, 홍암관과 대종교독립운동관 등 2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남 보성군은 홍남 나철선생 순명 100주기를 맞아 선생께서 태어나신 벌교읍 금곡마을에 홍암나철기념관을 개관하였다.

홍암나철기념관은 총공사비 76억여 원을 들여 사당 홍암사, 개천문, 전시관인 홍암관, 대종교 독립운동관, 자료실로 구서돼 있다.

 

홍암 나철(1863.12.2~1916.8.15) 선생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종교의 창시자이고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나두영, 개명은 나인영이며 자는 문향, 아호는 홍암이다. 본관은 나주이다.

 

전라남도 보성 출신인 그는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를 지냈으며 1891년(고종 28)에 가주서에 제수되고 1895년에 징세서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홍남 나철선생은 귀향한 후 1904년에 강진의 오기호, 부안의 이기, 최전 등 호남출신의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를 조식하였고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6월에는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 청, 일 3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체결하고 산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협조할 것을 일본의 정객들에게 제의했으나 별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황거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이철, 강원상 등을 포섭하여 자신회를 결성,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07년 자수하여 지도에 10년 유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후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풒려났다.

 

이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김봉준 일가가 소장하다 1983년에 후손이 독립 기념관에 위탁한 태극기이며 김봉준의 부인인 노영재가 1940년대를 전후하여 제작한 것이다.

 

홍남 나철선생은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종교운동에 주력해 1909년 1월 15일 한성부에서 대종교를 창시했다.

오기호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재동에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셔놓고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한 것이 단군교, 즉 대종교의 시작이다.

1년 뒤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 동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로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1914년에는 본사를 그 곳으로 옮겨 포교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 하였다.

 

 

대종교는 태고로부터 내려요는 고대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단군을 믿는 종교이다. 중광 교조는 나철로 초기에는 "단군교"라고 불렸다가 해방 후 대종교로 바꿨다. 근본 교리는 성, 명, 정의 삼진귀일과 지, 조, 금의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에 바로 일제강점기였던 탓에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2010년 현재 전국에 약 3,788명의 신도가 있으며 시교당(대종교의 교회)과 수도원 20여 곳 등의 조직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 대종교의 4개 경절로 중광절, 어천절, 가경절, 개천절 을 기념하고 있다.

 

대일항쟁기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이것은 우연히 얻어진 승리와 영광의 기록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은 물론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개척과 참여는 어느 집단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가능하였다. 일찍이 나철은 1907년 을사조약 처단의거를 주도하여 국권회복의 의지를 내외에 천명하였다. 나철이 1909년 "국수망이도가존" 이란 명분을 앞세워 부활시킨 대종교의 중광은 구국운동의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또한 대종교는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대일항쟁기 대종교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대내외에 천명한 일대 사건이었다. 항일운동 본산으로서 역할과 더불어 총체적 저항의 사표를 보여준 점, 그리고 단군구국론을 재확인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종교운동이나 독립운동 차원을 넘어 잠재된 민족의식과 민족정체성을 일깨무는 등 대종교는 민족정신을 각성시키는 정신적인 에너지원이었다. 참혹한 일제의 억압하에서 분연히 일어난 민족적인 저항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은 바로 대종교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고아복을 맞이하였다. 광복은 한민족이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얻어낸 성과였다. 제3세 교주 윤세복을 비롯하여 대종교 총본사 임원들은 1946년 6월 10일 환국하였다.

 

 

 

 

 

홍암 나철의 예언시(1915)가 있다.

을유년 8월 15일에 일본이 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나라를 남북으로 분단하도다.

공산주의와 외래 종교가 민족과 국가를 망치고 공산, 자유의 극한 대립이 세계를 파멸할지나

마침내 백두산의 밝달도가 하늘 높이 떠올라 공산, 자유의 대립 파멸을 막고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리라.

 

 

대종교 제1세 교주 홍암 나철이 직접 1911년부터 북간도지역 포교활동을 전개하다가 1915년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약 5년간 대종교 포교활동에 전념한 것은 대종교 신앙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함이었다. 나철은 만조로 대종교총본사를 이전한 후 교단을 정비하고 서울로 돌아와 남도교구에서 교단조직과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5년 조선총독부는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남도본사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애 나철은 일제의 간악한 탄압과 만행을 보고 견댈 수가 없어서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 천진전을 떠나 1916년 8월 15일 구월상 삼성사에서 유서를 남기고 순명하였다.

[내가 이제 많은 동포가 괴로움에 떨어지는 죄를 대신 받아 천하를 위하여 죽노라]

 

앞으로 이곳 홍암 나철기념관은 한국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올바른 역사교육의 장으로 발전시키며 의향의 성지로 가꿔 나갈 계획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런 독립운동가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저의 유튜브를 방문하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녹색로 5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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