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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진도군 가볼만한 곳 : 벽파항.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벽파정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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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 벽파항은 1993년 9월 10일 지방어항으로 지정 관리하여 왔으나, 어항법 시행규칙 제2조에 의한 지방어항 지정기준에 미달하여 2005년 4월 27일 지방어항에서 해제되었다.

명량해협을 지나 목포와 추자도를 잇는 배가 경유한다.

아주 작은 어항이다.

 

 

한눈에 보는 벽파항.. 아주 작은 항구이다.

 

벽파항에서 뒤에 언덕에는 벽파정이 있다.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 벽파정은 고려 희종(熙宗) 3년(1207)에 주로 중국을 왕래하는 국제적 사절을 위로하기 위하여 창건한 정자이다. 이후 조선 세종 11년(1465) 朴厚生 군수가 중건하였다. 현재 벽파정은 없어지고 옛 터 인근에는 '목포해양경찰서 벽파선박출입항대행신고서'건물이 있다.

벽파정은 고려 조선조에 걸쳐 문학누정으로 알려지며 많은 시인묵객들이 거쳐 갔다. 또한 국제사절 뿐만 아니라 발령으로 진도로 들어오고 떠나는 관료들, 유배자들의 작품도 많이 남아 있다. 고려조의 평장사 고조기, 예부상서 채보문, 우관의대부 김신윤, 한림원 학사 김극기와 조선조에 대사헌 김진상, 예조참판 이의철, 병조좌랑 홍 적, 공조판서 임응준, 이조참판 이경의, 신 규. 신백주 등의 작품이 전한다. 또 정언 이주, 대사헌 김정, 전라도관찰사 송인수, 유배에서 풀려나 영의정에 오른 노수신, 우의정 조태채, 정언 조희직 등의 유배인들의 시도 전해지고 있다.

 

이 건물이 벽파정이다.

 

벽파항 뒤에 큰 바위가 있어 항구와 앞의 섬을 볼 수 있다

 

벽파정에서 바로 위를 보면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2001년 10월 30일 진도군의 향토문화유산 제5호로 지정되었다.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1956년 11월 29일 건립) 이 전첩비는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면서 진도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하였다. 전첩비의 구조를 살펴보면 비신 높이 3.8m, 폭 1.2m, 두께 58cm이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

이 비는 벽파리 앞동산 산마루에서 동쪽을 향해 서있다. 당초 바위산을 이용하여 천연 거북좌대를 조상(彫像)함으로써 전첩비의 위용과 예술성을 격상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비수(碑首)는 고군면 내산리 구렁골에서 청석원석을 채석하여 작업하였고, 비신은 전북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추월산에서 채석하여 벽파로 옮겨 채석탁마공사를 하였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는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병량해전 승첩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 참전 순절들을 기록하기 위해 1956년 11월 29일 건립하게 되었다.

비신의 높이는 3.8m, 폭 1.2m, 두께 58cm 이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으며 모든 군민의 성력을 모아 이 비를 세웠다.

 

비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옥에서 풀려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이 53세 되던 정유년(1597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했으나 그대로 여기 이 바다를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회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 초 7일 적선 18척이 들어옴을 물리쳤으며 초 9일에도 적선 2척이 감포도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살피다 쫓겨 갔는데 공이 다시 생각한 바 있어 15일에 진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작은 배로서 330척의 배를 모조리 무찔렀고,

그날 진도백성들은 모두들 달려나와 군사들에게 옷과 양식을 나누었으며 이천구, 김수생, 김성진, 하수평, 박현, 박희승, 박희령, 박후령과 그의 아들 인복 또 양응지와 그 조카 계원 그리고 조탁, 조응양과 그 아들 명신 등 많은 의사들은 목숨까지 바치어 천추에 호구신이 되었나니 이는 진실로 진도군민의 자랑이로다, 진도 민속 강강술래 구슬픈 춤과 노래는 의병전술을 일러주는 양 가슴마다 눈물 어린다..

 

벽파항은 역사적인 곳이다.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부족한 병력과 무기, 군량을 확보하며 일본군과의 일대 접전을 준비 중이었다.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타격을 입은 이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지를 받았다. 교지를 받은 이순신을 전라도 쪽으로 서진하였다. 육로를 이용하여 구례와 곡성, 옥과를 거쳐 순천 낙안, 보성 열선루를 거쳐 장흥 회령포에 도착하였다. 회령포에 이르러 바다로 나가기 위해 그동안 이순신은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였다.

1597년 8월 29일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에 조선 수군의 진지를 구축했다. 이곳이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곳에 진을 친 조선 수군은 벽파진에 주둔한 며칠 동안 북풍이 강하게 불어 배를 제어하기 힘들었고 바람이 잠잠해진 후에는 추위가 엄습하여 전투력을 유지하기에 애로가 많았다.

 

 

벽파진 앞에 있는 섬

 

 

벽파항 앞에 보이는 섬..

 

이름은 모르고 구경한번 하고 가자.

진도는 역사적인 섬으로 유적지와 볼거리가 많다.

아이들과 함께 가면 학습과 공부도 되고 좋다.

 

 

주소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길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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