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유배문학관은 대한민국 최대 문학관으로 유배문학을 연구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10년 11월 1일 개관되었다.
주요 시설로는 남해의 자연, 역사, 생활, 문화를 소개하는 향토역사실, 전 세계 유배의 역사와 문학을 다루는 유배문학실, 유배 가는 길을 입체영상과 설치물로 관객들이 직접 체험하고 유배지에서의 생활상을 통해 유배문학이 탄생한 과정을 알아볼 수 있는 유배체험실, 김만중을 비롯한 6명의 유배객과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주요 문학작품 및 유배문학이 국문학에 끼친 영향을 소개하는 남해유배문학실이 있다. 네 곳의 상설 전시실 외에 건물 로비와 야외공원을 활용해 사진, 조각, 회화, 공예 등 다양한 기획 전시를 개최한다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건물은 지상 1층, 건축 총면적 2,416㎡, 부지면적 37,469㎡의 규모이다. 권력도 부귀영화도 모두 빼앗긴 채 '유배'라는 백척간두에 선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문학과 예술을 꽃피웠던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불멸의 혼을 기리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로 건립된 남해유배문학관은 세월 속에 잊혀져 가는 유배객들을 기리는 문학의 진한 향기가 피어나는 공간이다.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2,600점 이상의 고문서, 고서적, 민속품 등을 소장하고 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조선 후기에 김만중이 지은 수필·시화평론집 서포만필을 그의 종손(從孫)인 북헌 김춘택(1670~1717)이 필사한 필사본과 우암 송시열(1607~1689)의 문집 송자대전 103책 등이 있다.


남해유배문학관은 입구에서부터 관람로 동선이 그려져 있어서 따라가면서 구경하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유배의 종류는 2,000리 밖(약 800km 밖), 3,000리 밖(약1,200km 밖), 이주, 정배, 무기정배, 원지정배, 절도정배(외딴섬), 절도안치, 가극안치, 위리안치, 본향안치 등이 있었다.
유배 또는 귀양은 죄인을 먼 꼿으로 격리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유배의 강도 기준은 멀리 갈수록 무거운 형벌에 해당한다.
고려시대 충선왕은 티베트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하기도 하고
중국 후한의 경우 일남(베트남 중부지방)으로 가는 것이 유배중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일본은 유배지가 전부 섬이기 때문에 일절 도망치지 못했으며 유배형이 풀려야 그 서머에서 나올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형벌은 개인의 신체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형벌은 오형체제에 기초하여 주로 신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신체적 위해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오형을 구성하는 태형, 장형은 각기 형구로 죄인의 신체를 타격하는 형벌이었고 사형은 죄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형벌이었다.
태형은 태 10~50대까지 5등급, 장형은 장 60~100대까지 5등급, 도형은 장 60대·도배 1년~장 100대·도배 3년까지 5등급, 유형은 장 100대·유 2,000리~장 100대·유 3,000리까지 3등급, 사형은 교형·참형 2등급 등 모두 20단계의 형벌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범죄의 심각성에 따라 형벌의 가혹한 정도를 구분하여 체계화한 것이었다.
태·장·도·유·사 오형은 각 범죄에 별도로 적용되는 별개의 형벌이라기보다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체계적 형벌이었다. 같은 범주의 범죄에 대해서도 그 행위의 중함에 따라 태형→장형→도형→유형→사형으로 점층적으로 가중되는 연계성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람 간 폭행 사건인 투구(鬪毆) 범죄에서는 그 행위의 중대함에 따라 태·장·도·유·사의 처분이 나뉘고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을 폭행했으나 상대가 다치지 않으면 태형, 상대의 손발 뼈가 부러지거나 피를 토하는 등 상해가 중하면 장형, 갈비뼈를 부러뜨리거나 두 눈을 멀게 하면 도형, 영구적 장애를 남기면 유형,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면 사형으로 처분하였다. 위와 같이 오형은 하나의 연계된 체계 속에서 범죄 행위를 구분하여 처벌하는 정밀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형 방법은 공식적으로는 목을 밧줄로 졸라 죽이는 교형과 칼로 목을 베어 머리와 몸을 분리시키는 참형으로 구분되었다. 두 사형법 모두 목숨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동일했으나 그 형벌로서의 층위에는 차이가 있었다
『대명률』에서는 교형에 대해 ‘전기지체’, 참형은 ‘신수이처’라고 설명했는데, 글자 그대로 ‘사지가 온전히 붙어 있다’와 ‘몸과 머리가 따로 떨어진다’를 의미했다. 조선시대에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여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온전히 보전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으므로, 같은 사형이라 할지라도 목을 분리하는 참형이 더 중한 형벌로 여겨졌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 가혹한 사형 방식으로는 능지처사가 있다. 능지처사는 죄인의 몸을 여러 조각으로 찢어 죽이는 신체 절단 사형법이었다. 사형수 중에도 극도로 흉악한 강상살인·역모와 같이 인륜을 저버린 범죄에 대해 집행하였다. 중국에서의 능지처사는 칼로 살을 발라내어 수백 조각을 내는 방식이었으나, 조선에서는 사지를 분리하는 거열형의 방식으로 이뤄졌다. 거열형 역시 몸통·팔·다리·머리를 분리한다는 점에서 절단형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실제 법률에서도 교형-참형-능지처사는 점증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를 들어 노비가 가장을 욕하면 교형이었으나, 구타한 경우에는 참형으로 등급을 올렸고, 만약 살해하였으면 능지처사로 가형하였다.
이러한 신체 관념의 연장선에서 신체를 보전해 주는 특별한 사형 방법인 사사 즉 사약을 내리는 방법도 있었다. 사약은 말 그대로 임금이 내려 주는 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별히 왕족이나 고위 관료 출신 죄인 중 그들의 체면을 보존해 주면서 목숨을 거두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죄인을 싣고 가는 우마이다.


죄인들을 벌하는 형틀이다.


유배 문학은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지에서 쓴 문학 작품을 말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 정치적 탄압의 한, 자연 속에서의 삶, 충절 등을 주제로 시, 가사, 소설 등 다양한 장으로 창작되어 한국 고전 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정서의 '정과정'으로 시작해 조선시대 조위의 '만분가', 윤선도의 '견회요, '어부사시사' 등이 대표적이며 유배생활 자체가 작품 창작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유배형은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는 형벌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선비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고 창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여 한국 문학의 중요한 한 줄기를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특히, 유배가사는 유배문학의 대표적인 형태로 자리잡았다.







남해유배문학관 야외에도 유배문학인들이 있는데 특히 김만중의 동상이 있었다.
김만중(1637, 3, 6일 ~1692,6,14)은 홍문관 대제학 등을 지낸 조선시대 중후엽대의 소설가이자 문신이다.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친정 아버지 김만기의 동생이며 임술삼고변에 가담했던 김익훈은 작은 아버지가 된다.
숙종이 장희빈을 총애할 때 숙종의 면전에다 "조사석이 장차 정승이 된 것은 희빈 장씨 때문이 아니냐"고 항의하였으나 바로 파직되어 유배됐다가 1688년 방화되었다, 그리고 기사환국 이후 1689년 남인 박진규, 이윤수등의 정치보복으로 남해로 유배된 후 배소에서 병사한다.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구운몽"을 지었다.
1698년(숙종 24)에 관직이 복구괴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가 내려졌다.
구운몽은 자신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조선 숙종때 소설 문학 및 서민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김만중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씨남정기'에 대해 당시 인현왕후를 옹호하기 위해서 쓴 정치소설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역사 속의 《사씨남정기》는 명나라 때 있었다는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김만중은 주자주의가 지배하는 조선 왕조에서 집권 세력의 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당연히 주자주의로 일관했을 법하다. 하지만 훌륭한 가문이라서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때문인지, 주자주의에 대한 회의를 내비치기도 하고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기도 함으로써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당시의 보편 문어였던 한문으로 써야만 글로 여겼던 당대 분위기에서 김만중의 이 같은 자각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유배지로 떠나는 죄인..

유배지에서의 생활은 녹녹하다.



한양에서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는데 보통 남쪽의 섬들에 많이 보내졌다.
유배(귀양)는 죄를 지은 사람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특정지역으로 보내 강제로 거주하게 하는 형벌로 주로 정치적 이유(정적 제거, 권력 다툼)나 중죄(사형 대신)로 부과 되었으며 15%의 지식인들이 경험할 정도로 흔했다.
유배 이유는 사상적 문제(천주교 등), 왕권 교체기 정치적 사건, 관리의 부정부패 등 다양했지만 핵심은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통제하는데 있었다.
특히 정치적 쟁투인 당파 싸움으로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많이 이용되었다.
조선시대나 현재나 당파싸움은 끊이지 않고 있으니.. 백성(국민)을 위한 정치는 없는가..
정치란 '바로 다스린다' 는 말인데 자신들의 밥그릇만 생각하다니
다만 유배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처벌을 뛰어 넘어 유배지에서 문학 작품을 남기거나 새로운 지역 문화를 형성하는 지식인들의 사상정리 및 창작 활동의 공간이 되기도 한 것은 뜻있는 일이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유튜브 검색 "리차드박"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남해대로 2745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남 남해군 가볼만한 곳 : 남해보물섬전망대 & 스카이워크 (드론 영상) (26) | 2026.02.28 |
|---|---|
| 경남 남해군 가볼만한 곳 : 나비생태공원, 남해힐링숲타운 (드론 영상) (26) | 2026.02.26 |
| 경남 남해군 가볼만한 곳 : 금왕사 (드론 영상) (26) | 2026.02.24 |
| 경남 남해군 가볼만한 곳 : 남해대교, 노량마을 (드론 영상) (45) | 2026.02.22 |
| 경남 남해군 가볼만한 곳 : 금산 (드론 영상) (21) | 2026.02.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