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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진도군 가볼만한 곳 : 용장성. 용장사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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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용장성은 전라남도 진도군 용장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1964년 6월 10일 대한민국 사적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원종 때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이 원종의 육촌인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항거하였는데, 이때 고려의 장군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1270~1271)의 근거지로 삼은 섬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섬의 둘레는 3만 8,741척, 높이 5척이라 하였을 뿐, 그 이상의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용장사 모습

 

배중손이 이끌던 삼별초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항쟁을 벌였던 장소이다.

고려 고종 18년(1231)부터 침략해 오던 몽골과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의 전쟁을 벌였으나, 원종 11년(1270) 고려가 몽골에 항복을 하였다. 몽골에 대한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던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候溫)을 왕으로 삼아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에 궁궐과 성을 쌓고 몽골과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용장성이다.

 

절터와 궁궐터

 

지금은 용장산 기슭에 약간의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으며, 성 안에는 용장사가 있던 절터와 궁궐의 자리가 남아있다. 용장성 안에는 성황산이 있는데, 이 산에도 산성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성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하고 나름의 궁궐이 만들어진 점에서 가치있는 유적이다.

 

배중손 장군의 동상과 사당

 

 

현재  용장성 왼편에 용장사가 있다.

 

용장성은 군내면 용장리에 위치하며 고려 원종 11년(1270) 고려 정부가 몽고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환도를 강행하자 잉 불목하여 대몽항쟁의 결의를 다짐한 삼별초군이 현종의 8대손 승화루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도에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둘레가 약 13km 에 이르며 산성안에는 석축이 웅장한 계단형상의 행궁터가 남아 있다.

 

 

주변이 산으로 이루어진 산성안에 건물지가 남아 있는데, 웅장한 석축과 용장사 그리고 행궁 터가 남아 있다.

현재 성의 길이는 12.85km이며 가장 높은 곳은 4m 정도이다.

삼별초 대몽항쟁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하고 나름의 궁전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용장성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몽골군에 항전했던 성이다.

고종 18년(1231) 고려는 몽골리 침햑해 오자 항전하기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의 전쟁을 치렸으나 원종 11년(1270)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였다.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는 몽골레 대한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어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진도로 남하하여 궁궐과 성을 쌓고 몽골과의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에 쌓은 성이 바로 용장성이다.

용장성은 총 길이가 12.75km 이며 높이가 4m 내외로 군내면의 용장리, 세동리, 고군면의 도평리, 벽파리, 오류리를 잇는 산 능선을 따라 용상산을 빙 두르고 있다.

지금은 용장산 기슭에 성벽이 남아 있고 성 안에는 궁궐의 자리와 용장사가 있던 절터가 남아 있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의 왕실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궁궐과 성을 만들었는데 성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하고 자주국방의 기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유적이다.

 

궁궐과 건물을 지었던 주춧돌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삼별초는 최우의 집권기에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용사를 모아 매일 밤에 순찰, 단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야별초라 하였다. 군사의 수가 많아지자 이를 나누어 좌별초, 우별초라 하였고, 또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온 자들로써 편성된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라 하였다.

 

삼별초는 경찰과 전투 등 공적인 임무를 담당했으며 국가의 재정에 의하여 양성되었되어 녹봉을 받았으며 그 지휘자도 도령, 지휘, 교위 등 국가 관료가 배치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권신(권세있는 신하)의 사병과는 구별되어야 할 성격의 군대였으나 권신의 정치 권력과 너무 깊이 유착되어 있었다는 면에서는 사병적 성격이 농후한 것이었다. 군사활동에 있어서는 수도경비대, 친취대, 특공대, 경찰대, 전위대, 편의대 등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특히 몽골과의 전투에 있어서는 그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략을 피하여 최씨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의 전 시기를 통하여 삼별초는 가장 강력한 전투 병력이었다. 삼별초는 강화도를 수비하는 방어의 책임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자주 성을 나와 본토의 각지에서 몽골군과 대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고려는 1231년에 몽골의 침략을 당했고 다음 해인 1232년 고종은 왕실 귀족을 비롯한 조정관료들과 함께 모두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그 후 강화도는 1270년에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 몽골군과 대치하면서 나라를 지킨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때무터 강화를 강도로 불렀으며 지금도 강화도에는 고려시대 별도인 강도의 황궁터가 남아 있고 몽골과 항쟁하던 흔적들고 성곽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고려 무인정권의 군사적 배경이 되어 몽골과 항쟁해 왔던 삼별초는 개경 호나도가 (원종 11년, 1270) 알려지자 즉시 대항하고 나섰다. 그들은 배중손(?~1271)을 중심으로 개경 정부와 대립하는 새로운 항몽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곧 진도로 남천하였다.

 

삼별초가 진도로 남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강화도는 개경과 가까워 고려 정부군을 지배에 넣은 몽골군이 군선을 동원하여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놓았기 때문이다. 삼별초는 벼슬아치와 군인가족, 노약자와 일반인들을 여섯 곳으로 나누어 승선서켜 1,000여척의 배로 이동했다.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간 것은 1270년 8월 19일 이었다. 서서히 남천하면서 서해 일대의 도서를 장악했다. 원종은 정부군에 명하여 삼별초를 추격하도록 하였다. 추격군에는 몽골군 1,000여 명도 가세했다. 그럼에도 정부군은 삼별초를 두려워하여 접근하지 못했다. 진도는 다른 섬들과는 달리 바닷가에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육지와 가까이 있음에도 물살이 배우 빨라 배가 전복되기 십상이어서 외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기에 가능한 섬이다.

 

 

용장사 궁터 모형도

 

삼별초는 고려시대 최씨 무인정권의 특수 사병부대이다. 

1219년(고종 6년) 최충헌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가 도적과 치한 유지를 명분으로 내세워 최씨가의 정치적 권력을 탄탄히 할 목적으로 야별초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야별초의 숫자가 많아지자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고군의 포로였다가 탈출해 온 군사들을 신의군이라 불렀다.

후에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의 3개 별초군의 조직을 삼별초라 총칭했다.

여기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삼별초는 다분히 최씨가의 사병적 성격을 띠고 출발했지만 몽고의 잦은 침략에 맞서 싸우는 전투의 임무도 수행했다.

삼별초는 대몽항전에서 고려의 정규군 보다 더 강력한 전투력으로 활약했다.

 

 

주소 : 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산성길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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