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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보성군 가볼만한 곳 : 송재 서재필선생 생가 (드론 영상)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3.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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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선생의 생애를 보자

송재 서재필(1864.1.7 ~ 1951.1.5)은 전남 보성 외가에서 서광효와 성주 이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둘때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참고로 충남 논산에 서재필 선생의 친가가 있다.

7세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잠시 대전에 살았으나 곧 한성에 있는 외삼촌 김성근의 집에서 과거공부에 정진했다.

1884년 12월 4일 20세에는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켯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21세에는 1885년 5월 26일 일본을 떠나 미국 화물선 차이나호를 타고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했다. 1886년 ~1888년에 교회에서 사업가이자 교육가인 홀렌백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해리힐맨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미국의 풍습과 사상을 익히고 학문의 기반을 닦았다.

30세에 미국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고쳤다. 1894년 류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하여 두딸 (스태파니, 뮤리엘)을 낳았다.

32세, 1896년 1월, 김홍집 내각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고 동시에 유길준과 함께 신문간행계획을 추진했다.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자주, 자강의 계몽운동을 시작했고, 11월 21일 독립문 건립기공식을 거행했다.

 

34세, 1898년, 윤치호와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함께 의회개설운동을 전개했다.

35세, 1899 ~ 1903년 개인 활동 및 잠시동안 펜실베니아대학교의 위스터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40세, 1904년, 월크스 베리에서 해리 힐맨 아카데미 1년 후배인 헤롤드 디머와 함께 인쇄 및 문구사업을 시작했다.

54세, 1914년 ~ 1924년, 필라델피아에서 단독으로 필립 제이슨회사를 설립하고 경영했다. 1918년 12월 19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영문 잡지 발간을 제의했다.

55세, 1919년,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정한경과 함께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57세,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워싱텅회의 한국대표단의 부대표로 임명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 ~ 1935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민", "평화와 자유", "산업" 등에 활발한 기고 활동을 전개했다.

 

선각자의 땅, "박사마을" 가내마을에 서재필 생가가 있다.

가내마을은 해 뜨는 망일봉과 청정한 가내가 선경을 이루는 역사문화 인물의 성지이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송재 서재필 선생 생가가 있고 한말의병장 일봉 이교문 선생의 구국 혼이 깃든 마을이다.

문열공 이조년 후손들이 마을에 정착 11대를 이어 오면서 3학당을 개설해 선비들의 충심과 효심이 담긴 4대가 문집을 남겼으며 근현대에는 27명의 박사가 탄생하여 "박사마을"로 이름이 높다.

마을에는 성주이씨 보성 참의공 종가, 세방그룹 창업주 월봉 이의순 생가 등이 있고, 3백여 년 전통의 학당 천상재가 복원되었다. 마을주민이 설립한 농업회사법인 청정가내(주)는 더불어 살아온 우리민족의 두레정신을 오늘에 계승하고 있다.

 

83세, 1937년 ~ 1940년, The New Korea "Ran-dom Though"와 "My Days in Korea"를 기고하여 국세정세를 논하고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47년 7월 1일, 미국정청 수석고문이자 과도정부특별의정관의 자격으로 둘때 딸 뮤리엘과 함께 고국을 방문, 이후 민주주의와 통일된 자주독립 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84세, 1948년, 최능진, 정인과, 백인제 등 각계의 인사들이 서재필 대통령 추대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87세,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근교 노리스타운에 있는 몽고메리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생가 마당에는 멍석을 깔아서 잡초가 자라는 것을 방지했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지만 잘 관리되고 있었다.

 

 

 

초당

서재필선생은 1864년 1월 7일 이곳 초당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어머니는 "커다란 황룡이 초당 옆 큰 바위사이에 있던 뽕나무를 휘감으면서 승천하는 꿈"을 꾸고서 태몽이라 직감하고 그 뽕나무 잎을 전부 따서 갈아 마시고 외지에 있던 부군 서광언공을 오시도록하여 선생을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생하여 7세까지의 유년기를 보낸 선생은 미국에서 생활하다 귀국할 때마다 충생지인 본 초당의 현황을 자세이 묻고 그리워하였다. 초당과 뽕나무는 6.25 전쟁때 소실되었으나  2003년 새로이 복원되었다.

 

서재필 생가 

서재필의 외가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서재필 선생은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가담하였으나 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895년 귀국하여 이듬해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하며 민권 신장에 힘썼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갈등을 빚게 되자 189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미주 동포들과 함께 한국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1921년 워싱텅 군축회의, 1925년 범태평양회의 등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서재필이 태어난 집은 6.25 전쟁때 소실되었는데 2003년 복원하여 그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내길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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