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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고흥군 가볼만한 곳 : 발포만호성 (드론 영상)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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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에 있는 발포만호성은 조선시대 만호(종4품)가 지휘하던 수군이 있었던 곳이다. 

발포진은 세종 21년(1439)에 만호가 배치된 수군진이 되었으며 성곽은 성종 21년(1490)에 둘레 1360척(약 626m), 높이 13척 약6m 규모로 축조되었다.

임진왜란 당신 발포진은 전라좌수영에 소속된 수군진(5관5포)으로 당시 발포 만호로 황정록과 소계남이 이순신의 지휘를 받아 활동하였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선조 13년(1580)에 이순신이 발포만호로 부임하면서 처음 수군으로 재직했던 곳이다. 이곳과 관련된 이순신의 일화는 [이충무공전서], [행록]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흥양(조선시대 고흥의 명칭)현은 고려말 조선초 왜구가 창궐하면서 연해 방어 거점으로서 부각되었다.

그 예로 전라좌수군이 관할하는 5관(순천도호부, 낙안군, 보성군, 광양현, 흥양현), 5포(방답진, 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중 1관(흥양현), 4포(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수군의 지휘체계는 수군절도사(정3품) - 침절제사(종3품) - 만호(종4품) 로 이루었는데 사도진에는 첨사(종3품)가,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에는 만호(종4품)가 주둔하였다.

임진왜란 기간동안 흥양의 1관 4포는 중요한 수군 거점으로 황용되었다.

 

말포만호성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고흥"은 1270년부터 사용한 지명이며 조선시기에는 "흥양"으로 불리었다. 

이순신은 고흥을 "영주(금강산)'라 표현하였다. 이순신은 고흥에서 6차례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전사하기 10전까지 나로도에서 흥양선소를 설치하여 중국 진린 제독과 사변에 대처한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고흥은 이순신이 수군지휘관으로서는 처음 근무한 곳이다. 

1580년 7월부터 1582년 1월까지 18개월 동안 그가 근무한 발포는 발포선소와 본현선소가 있었다. 조선 최고의 수군기지였다. 그리고 조선후기까지 5호 거북선을 만든 곳이다.

이순신이 고흥에 2차로 방문한 것은 "난중일기"에 1592년 2월 19일부터 2월 26일까지 7박8일 이다. 1592년 2월 19일 여수 백야곶을 출발하여 고흥 여도진에 도착하였다. 여도진을 시작으로 고흥관아, 본현선소, 녹도진, 성두(발포), 발포진, 당오리 세동리 옥강리 내초 사도진에 이르는 8일동안 군사 진지를 살폈다.

이순신이 고흥에 3차로 방문한 것은 "난중일기"에 1596년 윤8월 18일부터 윤8월 20일까지 2박 3일이다. 이순신은 고흥 양강역, 남양산성, 향소청, 도양둔전, 득량도를 순시하며 방책과 전선, 무기 등을 몸소 점검하였다.

이순신이 고흥에 4차로 방문한 것은 1598년 7월 18일부터 24일까지 7박8일이다. 

1598년 7월 18일 중국 수군 진린 부대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군을 추격하여 7월 19일 절이도 앞바다에서 50척의 일본군 전함을 불태웠다. 이어서 7월 24일 녹도전양에서 적군 전함 6척을 나포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2명을 생포하고 69급을 베었다. 이순신은 조선수군 7,300명과 중국 명나라 진린 제독의 13,200명으로 조명연합군을 결성하여 일본군을 격파한 것이다. 이순신이 5차로 방문한 것은 1598년 9월 15일부터 9월 18일까지 3박4일이다. 

이순신은 나로도에 유진하며 조.명연합군을 이끌고 해상에서 동진하여 방답진까지 진출하였다. 이순신이 고흥에 6차로 방문한 것은 1598년 10월 12일부터 11월 9일까지 27박 28일이다. 

순천 왜교의 적들을 돌아가는 길을 끊고 사변에 대처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도진, 양강역, 남양산성, 흥양현, 향소청, 본현선소, 녹도진, 성두(발포성), 발포진, 사량(초량), 도양 둔전 등 이 지역의 중요한 요충지를 직접 살폈다. 그리고 절이도와 나로도 바다에서는 해상전투의 전적지를 남겼다.

 

이순신이 발포만호로 있을때 (1580.7 ~1582.1)  전라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 욕심으로 이 자리에 서 있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했다. 직속상관이었던 그가 보낸 부하들이 이곳에 들이닥쳤을때였다. 

"이 나무는 관청의 재물로 오랬동안 잘 자란 것인데 누구도 함부로 베어갈 수가 없다"라고 하며 허락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결국 전라좌수사가 크게 성내었으나 감히 베어 가지는 못하였다. 오늘날 이를 기념하여 발포 관아의 자리에 이순신이 길렀던 오동나무와 같은 수종을 식재하엿다.

상관의 사리사욕을 질타하고 객사의 오동나무를 지켜냈던 발포만호 청렴강직했던 이충무공의  정신이 우리를 일깨워준다.

 

 

시대가 변해도 지켜내야 할 청렴정신을 오늘에 새겨 소박하지만 정성을 담아 발포만호 이순신 오동나무 터와 "청렴광장"을 지었다.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는 이순신 장군이 발포만호로 재임할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전라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 욕심으로 오동나무를 베어가려하자 "이 나무는 관청의 재물로 누구도 함부로 베어갈 수 없다"고 한 유명한 청렴 일화를 간직한 곳입니다. 이에 고흥군에서는 이러한 역사를 단순히 흘러간 과거의 시간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여는 창이라는 인식으로 이순신 장군의 청렴 강직했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발포만호 이순신 오동나무터 조선]과 함께 [청렴광장 조성]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5월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이순신 장군의 첫 수군과 인연을 맺은 발포만호 부임연도를 상징한 1580개의 [청렴 박석(바닥돌)]을 분양하였고 이를 포함해 총 6,237개의 박석으로 어우러진 청렴박석 광장을 조성하였습니다.

이 광장은 이순신 장군의 청렴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외부 용역없이 직원들의 순수 아이디어와 국민들이 신청한 박석 비용을 포함하여 검소하고 소박하게 조성하였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청렴 순례지로 그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청백리는 맑고 흰것 같은 벼슬아치를 의미하는데 쉽게 말해서 "청렴결백한 관리"릐 줄임말이다. 절대로 부정부패와 권력형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관료, 정치인을 뜻하는 단어이다. 반대말은 탐관오리이다.

조선시대 3대 청백리는 맹사성(1359~1431), 황 희(1363~1452), 박수량(1491~1554)등이다.

 

현 시대에도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은 청백리를 실천해야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녹을 먹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유튜브 검색 "리차드박"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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