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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고흥군 가볼만한 곳 : 발포역사전시체험관 (드론 영상)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3.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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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은 고흥반도와 유인도 15개, 무인도 154개 등 모두 169개 섬으로 이뤄졌다. 동쪽은 순천만을 건너 여수시, 서쪽은 보성만을 건너 보성군, 장흥군과 접하고 남쪽은 다도해를 향해 있다. 

고흥반도는 벌교 부근에서 뻗어 내린 소백산맥의 한 지맥이 바다에 가라앉으면서 생겼다. 좁고 낮은 지형으로 육지와 연결되는데 가장 좁은 부분의 폭은 3km 이다. 군 전역이 작고 낮은 산으로 이뤄져 있고, 육지와 연결되는 곳과 해창만 연안에 좁은 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반도라는 중요한 특성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하여 수많은 외침을 당해왔다. 이는 한반도가 약소국의 대상이 아니라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으로 반도위치에 삼면을 둘러싼 바다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작용했다.

고흥반도는 거의 4면에 바다를 끼고 있는 형국이고 고산대수가 사방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라는 점에서 그 만틈 중요한 군사적,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에 해안 방어 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많은 해안선이 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고흥은 여말 선조 왜구의 침입이 치열해지면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고흥 지방에 축조된 산성이나 읍성이 예외 없이 석축으로 되어있음은 이를 나타낸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할 무렵 조선의수군은 함경도의 경성에 북병영과 북수영, 북청에 남병영, 함흥에 남수영, 전라도의 강진에 병영, 여수에 좌수영, 해남에 우수영, 경상도의 울산에 좌병영, 진주에 우병영, 동애에 좌수영, 거제에 우수영이 있었다.

전라좌수영의 관할하에 있었던 군현은 순천도호부, 낙안군, 보성군, 흥양현, 광양현의 5관이 있었으며 수군진은 사도진, 방답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의 5포가 있었다. 전라좌수영 5관 5포는 임진왜란 당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군을 격파, 국난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군 제도가 법제상 확립됐다. 수군도진관 체제에 따라 각 도마다 주진, 거진, 제진으로 편제되어 주진에는 수군절도사, 거진에는 수군첨절제사, 제진에는 만호가 배속되었다. 그 뒤 1593년(선조 26년)에는 통제영을 두어 경상, 전라, 충청도 수군을 통제사가 지휘하도록 해 남해안 방어를 강화했다. 1627년(인조5년)에는 수도권 방위를 위하여 강화에 통어영을 두고 경기, 황해도 수군을 통솔하게 했다.

 

* 임진왜란 당시 조선 해군의 병력상황을 보자

전라우수영 : 전함 30척, 해군 5000명         전라좌수영 : 전함 25척, 해군 4000명

경상우수영 : 전함 75척, 해군 12000명       경상좌수영 : 전함 75척, 해군 12000명

* 임진왜란의 배경과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여 년간 전쟁이 계속된 일본 전국시대를 평정했다. 이 시기 일본은 각 지역 영주(다이묘)들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도요토미는 일본을 통일한 뒤 영주들에게 해외 정복계획을 밝혔다. 하급 무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중국 대륙을 정복해 위세를 떨치고 싶었다. 그는 조선에 명나라 정복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1591년 8월 조선 침략을 선언하고 1592녅 1월 군사와 물자동원령을 내렸다. 이때 동원된 왜군 병력은 총 30만명에 이른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음력) 1만 8700명의 왜군을 실은 전함 700여척이 쓰시마 섬을 출발하면서 임진왜란은 시작됐다.

 

*발포만호

만호는 조선시대 각 도의 여러 진에 파견된 종4품의 무관직을 말한다. 이순신 장군은 36세 때인 1580년(선조 13년) 7월 발포만호로 부임해 1582년(선조 15년) 1월까지 재임했다. 그러나 고흥에 머문 시절이 이순신 장군에겐 고난의 시기였다. 직속상관이 사사로이 관사 앞뜰의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하자 이를 막다가 모함을 받은 곳이 고흥이다. 이후에도 몇차례 모함을 받다가 결굴 직위에서 파면돼 18개월 만에 한양으로 돌아갔다.

* 이순신 장군의 발포만호 시절 일화

이순신이 36세인 1580년 발포만호로 재직할 때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진만호성 객사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러 거문고를 만드는 것을 반대했다가 군기경차관 서익이 군대무기를 검열하고 가서 조정에 거짓 보고를 올림에 따라 파직되어 고흥을 떠나게 되었다. 이순신은 나라의 물건을 사사로이 쓸 수 없다는 대나무 같이 곧은 인품을 보여준 일화가 서린 곳으로 2006년 그 장소를 기리기 위해 봉충회에서 오동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이순신은 36세 때인 1580년 부터 1년 6개월 동안 발포만호로 고흥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전라좌수영은 그리 생소하지 않았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란이 일어날 것을 애견하고 전쟁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수군을 훈련시키고 병기를 점검했으며 배를 만들고 각 포구에 방어 철책 등을 구축했다. 전라좌수영 본진 수군은 여수 오동도에서 훈련을 했고 이순신을 비롯한 장수들은 전술 훈련과 활쏘기 등에 힘을 쏟았다. 고흥 출신 조방장 정걸은 이순신보다 30세 많은 장수인데도 이순신을 도와 개량된 판옥선을 만들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4월 12일(음력) 지.현자총통 시험 발사 연습을 마친 상태였다. 이순신은 관내 5관(순천도호부, 낙안군, 보성군, 광양현, 흥양현), 5포(방답, 사도, 여도, 발포, 녹도진)를 수시로 순시하여 군대를 점검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수군을 총지휘하는 조선시대 관직으로 종2품이다. 지휘 관청과 해군 기지로 삼도수군 통제영을 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해인 1593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이 임명됐다. 삼도수군이 조선수군의 대부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삼도수군통제사는 사실상 오늘날의 해군 참모총장인 셈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종2품으로 법제화됐다.

 

발포진은 지금의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일대에 있었던 수군 진영이다. 전라 좌수영 산하의 수군 진영으로 건치연혁에 대해서는 1834년 동헌의 실화로 문적이 소실되어 알 수 없다고 지도 상단에 기재되어 있다.

지도에는 진영의 모습이 회화적 기법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특히 성밖의 빽빽한 민가의 모습은 다른 진영릐 지도에서는 보기 힘들다. 진성은 1490(성동 21년)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며 1589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한 때 발포 만호로 부임하기도 했다. 선소에는 선박의 모습과 함께 방파제에 해당하는 석돈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군병의 상세한 내역이 수록되어 있는데 전선군병은 166명, 병선군병은 52명, 사후선에는 격졸 6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볼 때 병선은 전선을 축소한 형태로 판단되며 전선처럼 전투를 위해 제조되었던 선박으로 보인다.

 

* [선조수정실록]의 거북선 기록

판옥선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검은 칠을 했다. 적이 배 위에 올라 올 수 없도록 판자 위에 칼이나 송곳을 꽂았다. 전투 시에는 판자 위에 거적이나 이엉 같은 것을 씌워 적이 배에 올라와도 찔리도록 고안했다. 송곳 등이 꽂혀 있어 활동 공간이 좁은 갑판 위에는 대포와 활을 쏘는 군졸만을 소수 배치했다. 배 밑도 적이 쉽게 타고 올라오지 못하는 구조였다. 대포는 앞뒤에 한개씩, 양옆에 여섯 개씩 달았다. 공격할 때는 대포를 일제히 발사했다. 적의 배를 들이받아 산산조각을 냈다. 대포가 있는 아래층 판옥 안에 격군 20명을 배치해 3명씩 한 조가 되어 노를 젓도록 했다. 서서 저었기 때문에 앉아 젓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이었다. 

 

전라좌수군은 1592년 4월 (음력)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5월 4일 전라좌수영에서 처음으로 출진을 결행했다. 전선은 판옥선 24척, 소형병선 15척, 어선 46척이었다. 이 중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대표적인 전함이었다. 1층에서는 격군이 노를 젓고 2층에서는 병사들이 적선을 공격할 수 있는 구조였다.

전라좌수영 본영과 5관 5포의 수군 부대에서 출동한 판옥선은 본영 3척, 5관 11척, 5포 10척 등 모두 24척이었다.

이 중 고흥에 속하는 1관 4포 에서는 전라좌수군 판옥선의 절반에 가까운 11척이 출전했다. 판옥선 1척당 120명을 탔다고 보면 고흥수군은 13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백병전에 능한 일본군은 주로 상대방의 배에 올라타 싸움을 벌였다. 이런 일본군을 막기 위해 조선은 판옥선의 몸체를 높고 크게 제작하였다. 판옥선의 높은 구조는 위에서 아래로 활을 쏠 때 매우 유리했고 하포를 올려놓는 포좌가 높게 만들어져 명중률 또한 높았다.

ㄱ공간을 2, 3층으로 구분하여 설계해 노를 젓는 격군과 함포를 발사하는 보수가 서로 방해받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배 밑바닥이 평펑한 평저선으로 수심이 앝은 곳에서도 효과적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키를 잡고 돌리면 제자리에서 바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판옥선의 등장으로 상대적으로 작고 견고함이 뒤떨어지는 일본 군선으로부터 조선의 바다를 지킬 수 있었다.

 

1592년 치러진 네 차례의 해전(당포재전, 사천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에 참전한 조선의 수군은 왜선 330여 척을 격파하였다. 임진년 해전의 전투상황과 전과를 소상히 기록한 이순신의 정계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옥포파왜병장], [당포파왜병장], [견내량파왜병장], [부산파왜병장] 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옥포해전에서는 부상자 1명, 당포해전에서는 전사자 13명에 부상자 37명, 견내량해전에서는 전사자 19명에 부상자 110명, 부산포해전에는 전사자 6명에 부상자 25명으로 집계되어 모두 211명으로 나타나 있다.

소속별로 보면 흥양수군 39명, 사도수군 34명, 여도수군 29명, 녹도수군 16명, 발포수군 13명의 순으로 확인된다. 총 211명의 사상자(전사자 38명, 부상자 173명) 가운데 고흥구순이 131명, 즉 전체의 2/3에 가까운 62%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와 같이 사상자수가 많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활동과 함께 그에 따른 희생이 그만큼 컸음을 뜻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 같은 통계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임진왜란 해전에서 보여준 고흥수군의 전투력이 곧 전라좌수군의 전승동력으로 작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봉수대가 있었는데 봉수 제도는 적의 움직임이나 지역의 위급 상황을 중앙으로 알리던 군사 통신수단이다. 봉수는 횃불인 봉과 연기인 수로 구성돼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통해 상황을 전달했다. 

봉수는 전화나 전신 등이 등장하지 않았던 시대에 정보를 신속하게 멀리 전달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원거리 통신수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처음 도입돼 고려시대에 제도화되었고 조선 세종때 전국적으로 정비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5개 봉수 노선이 운영됐다.

고흥군에는 금산면 적대봉 사화랑 봉수대, 도화면 유주산 봉수대가 있다.

 

 

고흥에는 국난을 이겨낸 고흥 사람들이 많았다.

나대용(1556~1612)  본관은 금성, 자는 시방이다.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선조 24)에 전라좌수영수사로 있는 이순신장군을 찾아가 그 동안 연구한 거북선의 설계도를 보이는 한편 국방에 대한 계책을 아뢰었다. 충무공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막하에 두고 거북선 건조를 위시환 모든 전구의 준비 계획과 추진에 참여시켰다. 그는 병선건조에 온갖 정력을 쏟는 한편, 충무공과 함께 목포, 당포, 사천 등 15여 회의 해전에서 왜적과 왜선을 도륙하는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후에도 새 전함인 창선을 창안 건조하였고 남해현감으로 있을때는 쾌속정인 해추선을 발명하였다.

이대원(1566~1587) 본관은 함평, 자는 호연이다. 1583년 (선조 16) 무과에 급제하고 1586년 선전관으로 있다가 녹도만호가 되었다. 1587년 남해안에 왜구가 침입하자 부하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20여척의 배를 대파하는 전과를 올리고 적장을 붙잡아 수사 심암에게 바쳤으나 전공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심암의 요청을 거절하여 미움을 샀다. 다시 왜구가 흥양에 침입하자 심암의 명으로 군사 100여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손죽도 해상에서 적과 격투 끝에 붙잡혀 항복을 거부하다가 살해당하였다. 병조팜판에 추증되었으며 고향에 충신정문이 세워졌다.

정운 (1543~1592) 본관은 하동, 자는 창진, 시호는 충장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 웅천현감을 지냈다. 제주판관 때 목사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녹도만호가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부산포해전에서 추격 도중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면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송덕일 (1566~1616) 본관은 남양, 자는 치원, 호는 조은이다. 내금장 인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몽진할 때 훈련원첨정으로 호종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진도군수로서 거북선을 증수하여 이순신을 명량대첩을 거두는데 공을 세움으로써 전란이 끝난 후 선무공신에 서훈되었다. 1611년 (광해군 3) 동관첨사로 있을 때 동관진이 여진족의 공격으로 무너진 상황에서도 군사를 모아 무너진 해자에 포대와 성곽을 쌓는 등 공을 세워 왕에게 준마를 상으로 받있다. 얼마 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여진족 고면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진무성 (1566~미상) 본관 여양, 자는 사규, 호는 송계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 휘하 중군 소속으로 당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1606년(선조 39) 유원정제첨사로 야인 홀랄온이 함경도 훈융현에 침입한 것을 미리 막지 못하여 해임되었다. 1627년 (인조 5) 정묘호란 때 중군으로 통제사의 직무를 대행하다가 풍랑으로 왕을 강화로 호종하지 못했다 하여 체포하러 온 포사를 위사라고 호통치며 오히려 죽이려고 했다 .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왕이 감동하여 구성군수에 임명하였으며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송심 (1590~1637) 본관은 여산, 자는 사윤이다. 1614년(광해군 6) 무과에 급제. 북변수비에 종사하고 돌아온 뒤에는 노모를 봉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뒤 통제사 구굉의 천거로 선전관에 기용되고, 이어 전라도 병마우후를 거쳐 1635년 (인조13) 홍원현감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함북 병마절도사 이항 휘하에서 척추장으로 있다가 와의가 성립되자 횡포를 부리며 철수하는 후금군을 추격, 안변 남산역에서 전, 후 영장과 함께 분전 끝에 전사했다.

신여량 (1564~1593) 본관은 고령, 자는 중임, 호는 봉헌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도원수 권율의 부장이 되어 이듬해 행주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다시 통영으로 내려가 수군ㅇ르 지휘하였다. 철정, 화전 등을 이용한 전술로 적선을 대파한 공으로 수군절도사에 오르고 통제사 이순신의 선봉장으로 전공을 세워 [당포승전도]를 하사 받고 진도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병조판서가 추증되고 흥양의 사당에 제향되었다. 

송희립 (1553~1623) 본관은 여산, 자는 신중이다. 간의 6대손이며 대립의 아우이다. 1553년(명종 8)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조선중기의 무신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으로서 영남지역에의 원병파견을 주장하였고 지도만호가 되어 형 대립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양하였다.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적에게 포위된 명나라의 제독 진린을 구출하였으며 1601년 양산군수, 다대포첨절제사를 지내고 전라좌도수군절도가가 되었다.

송대립 (1550~1597) 본관은 여산, 자는 신백이다. 1594년(선조 27) 임진왜란 중에 부과에 급제, 지도만호인 아우 송희립과 함께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있었다. 그 뒤 도원수 권율 휘하로 옮겨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의별잘이 되어 전공을 세웠으며 흥양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무찔렀으나 복병을 만나 전사했다. 경사에 밝고 무예가 뛰어났다.

정걸 (1514~1597) 본관은 영광, 자는 영중, 호는 송정이다. 1514년(중종 9) 12월 2일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에서 태어났다. 1544년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선전관을 지냈다. 1553년(명종 8) 서북면 병마만호를 지낸 뒤 1555년 을묘왜변 때 달량성에서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남도포 만호가 되었다. 1591년에는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받았으며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을 만들고 화전, 철령전 등 여러가지 무기를 만들었다.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요청으로 한산도에서 왜적을 방어하고 12월에는 전라도 방어사로 부임해 남서 해안에서 왜적 토벌에 전념하였다.

 

조선시대 전라도에 왜적을 막으며 지켜냈던 고흥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장군들이지만 수군으로 싸웠던 병사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조선의 이름없는 호국영령들이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유튜브 검색 "리차드박"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충무사길 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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