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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북 고창군 가볼만한 곳 : 김성수생가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1.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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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생가는 1861년에 세워진 가옥으로,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副統領)이며 정치, 언론, 교육,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근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촌 김성수(金性洙)(1891∼1955) 선생의 생가이다. 또한 인촌의 동생이자 민족자본 육성의 대표자인 수당 김연수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주식회사와 동아일보, 삼양사를 세웠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세웠다.

이곳은 우리 근대사에 많은 발자취를 남긴 김성수 선생과 김연수 선생이 평생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모습을 함께 되새겨 볼 수 있어 더욱 뜻이 깊은 집이다.

김성수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다.

 

김성수 생가는 현재 전반적으로 많은 보수가 이루어져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가옥에 들어서기 전 가옥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 석회 돌담은 새롬게 증축되지 얼마 되지 않은 담으로 깔끔하게 가옥을 지키고 있다. 대문을 지나 집안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굴뚝 꽃담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들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기와와 석회로 만들어진 굴뚝 꽃담은 다양하고 아름다운 문양들로 만들어져 있으며, 기와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패턴이 얼마나 많은지를 자랑하려는 듯 서있다. 아름다운 꽃담들은 만들어졌을 당시의 가옥 주인의 미적 감각과 높은 부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큰댁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작은댁 안채는 두 분의 조부인 김요협 옹이 세웠고, 큰댁 사랑채의 문간채는 고종 30년(1893) 인촌 선생의 양부인 김기중 옹이 지었다. 작은댁 사랑채는 1903년 두 분의 아버지 김경중 옹이 지은 것이다. 1907년 봄, 그 당시 이 고장을 휩쓸던 화적떼의 행패로 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사한 뒤 이 건물을 마을 사람들에게 위탁하여 보존해 오다가 1977년 8월 수당 선생이 자비를 들여 옛 모습 그대로 보수하여 복원하고 노폭 5m의 진입로도 만들었다.

이곳은 우리 근대사에 많은 발자취를 남긴 김성수 선생과 김연수 선생이 평생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모습을 함께 되새겨 볼 수 있어 더욱 뜻이 깊은 집이다.

 

김인촌선생 생가는 김성수와 김연수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1861년부터 한채씩 지었다. 인촌은 원래 이들이 태어난 마을 이름인데 김성수가 호로 사용하였다. 1891년 작은집 안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일제강점 말기에 일제의 침략정책에 협력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알려졌다.

 

인촌 생가는 긴 직사각형의 대지 위에다 낮은 담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큰집, 남쪽에는 작은집을 배치하였다. 한 대지에서 독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이하다. 생가 규모도 커서 조선 후기 전라도 지방 토호의 부유한 거주 환경 및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방은 제20대 정운천 국회의원이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거주한 곳이다. 그는 제17대 정부의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을 지냈고 전주에서 32년 만에 보수당 출신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풍수 전문가들은 "안채 바로 앞마당에 솟은 샘은 진응수로서 길지의 증거가 되고 그러한 땅은 삼정승을 배출한다"라고 하고 있으며 이를 증명하듯 이곳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선생이 태어난 바로 그 방이기도 하다

정운천의원은 인촌과 친척으로 그가 설립한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인촌과 같이 정치 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다.

정운천은 김성수와의 인연으로 어려서부터 인촌이 강조한 선공후사의 정신과 그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어려운 상황이 직면할 때마다 교훈으로 삼았으며 인촌이 설립한 고려대학교에서 수학했으니 참으로 특별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부잣집 답게 부엌에 수조가 있다.

 

 

집이 워낙 미로처럼 돼 있고 넓어서 드론으로 봐야만 전체적인 구도을 잡을수 있었다.

이정도의 집을 꾸려갈려면 집안일 하는 사람만 몇명이나 됐을까...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43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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