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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북 고창군 가볼만한 곳 : 동학혁명기포지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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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는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에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다.

2014년 10월 31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동학농민군의 무장기포지는 한국근대사에서 스스로 전국에 걸쳐 사회개혁 의지를 처음으로 드러낸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의 하나로 상징성이 매우 큰 유적지이다.

 

무장기포지는 동학 농민 혁명 과정에서 고부 농민봉기가 전국적인 무장봉기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은 역사적인 유적지이다.

1894년(고종 31)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후임 군수 박원명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하였으나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봉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횡포가 극심해지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무장현에 전라도 일대의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3월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하였다. 무장기포는 고부 지역에 한정되었던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새로운 국면의 출발점이 되었다.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는 1차 동학농민혁명이 시작한 곳이다.

천주교와 서양문물 들을 뜻하는 서학과 대비가 된다는 의미의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이다

고부 농민 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관군의 소탕을 피해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찾아 함께 손을 잡고 농민들을 모아 훈련시켜 봉기했던 곳이 바로 이곳 당뫼이다.

1894년 3월 20일경에 재봉기하면서 밝힌 무장포고문에는 봉기의 이유와 목적 등이 담겨 있다.

이는 세상에 거대한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19세기 후반 지역적 민란의 성격을 뛰어 넘어 반봉건, 반침략을 지향하는 개혁운동이자 전국적 항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봉건 사회에 마지막 결정타를 입혔으며 열강의 침략에 대한 아시아 민중의 저항 의지를 확연히 보여준 반제국주의 운동이었다.

이 농민 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뒤의 항일 의병운동과 3.1운동 독립만세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뫼 : 고창 공음의 구암 또는 구수라는 마을 앞에는 큰 당산나무가 있었다하여 마을 이름을 당뫼라 불렀다.

 

 

 입구에 기포지 조형물이 있었는데 동학농민혁명 성지화 사업 및 국가문화재 지정을 위해 

(구)신왕초등학교로 이전설치하였다는 프랑카드가 걸려 있다.

아래 사진 가운데에 조형물이 있었던것 같다.

 

이곳 구수내에서 시작하여 소속재-과실재-무장읍성-하마등-첨금정바위-월증-끄렁재-사신원 인천강-

굴치재-맹감다리-석호-사.후포-목우-줄포-눌재-고부관아를 들이쳤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은 이곳에서 동학농민들을 훈련시키고 준비했다.

 

 

당산나무 

1894년 4월 25일(음력 3월 20일) 무장기포가 일어난 공음면 구수마을은 예부터 당산마을로 불리어진 곳으로 마을의 상징성을 반영한 당산(느티)나무를 이 곳에서 식수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유구히 계승하고 무장기포지를 지켜주기바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장기포 제116주년을 맞이하여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3대 장군 후손 및 유족. 기관단체장. 주민 등이 참여하여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의 뜻을 기리는 기념식을 갖고 기념식수를 하였으며 세계적인 농민혁명운동으로 선양되기를 기원하였다.

 

소나무 3그루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은 1894년 4월 25일(음력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 무장창의포고문을 선포한 유서 깊은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지역 민란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봉기로 출발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나무를 변함없이 늘 푸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역경에 처했을때 더욱 푸른빛을 발하는 꿋꿋한 절개 미래지향적인 군민을 상징하는 군목이다.

 소나무 3그루는 동학농민혁명이끈 총대장 전봉준(중앙), 총관령 김개남(좌), 총관령 손화중(우) 등 3대 지도자를 상징하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창군으로 통합되기 이전인 고창현. 무장현. 흥덕현을 의미한다.

기념식수는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하여 기관단체장, 전봉준 증손 전성준. 김개남 증손 김상기, 손화중 손자 손홍열 등 20명이 참여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 제 115주년을 맞이하여 매듭풀이와 전국의 주요 동학농민혁명유적지의 흙을 합하는 합토의식 등을 통하여 지역적 갈등을 해소하고 조국의 번영을 염원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곳에서 과거 민초들은 개혁과 부패한 탐관오리를 징벌하려고 모였다.

관리가 청렴하기란 어려운 것인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직접적 원인은 잘 알려져 있듯이 전라도 고부(古阜)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폭정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최후 진술을 읽어보면, 조병갑이 저지른 폭정은 고부군 한 곳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조선 팔도 대부분의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현상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19세기말 조선 민중들은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일컬어지던 지배체제의 모순 아래 지방관으로부터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제1의 배경이다. 

당시 참여 인원은 200~300만이었다고 하니 당신 인구의 1/3, 1/4 정도였다고 한다.

나라가 망할려고 하니 부패. 수탈. 폭정. 뇌물.. 

몇년전 촛불집회가 민초들의 반란이 아니던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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