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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강진군 가볼만한 곳 : 다산박물관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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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 가면 다산 정약용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강진 다산박물관에 가보자

 

조선 후기 개혁, 개방의 학문을 실천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현대적인 가치로 계승 발전시키고자 설립된 다산정약용은 강진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자 문화시설이다. 현대 다산청렴연수원을 새롭게 운영하여 다산의 목민, 청렴 정신을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역의 대표 박물관으로서 전시와 함께 가족단위 관람객이 즐기며 배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며 스스로 만드는 재미와 함께 다산의 정신을 체험해보는 다양한 연령별 체험프로그램 9종 다산체험학습장을 운영하고 있다.

 

개원 이래 자타가 공인하는 다산실학의 본부로 자리매김해 온 다산실학연구원은 다산박물관 2층에 자리하고 있다. 설립목표는 강진학과 다산실학의 연구 범위를 확장 및 심화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학술대회, 시민강좌, 지역자료 조사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본관은 나주 정씨이다.

아버지 정재원은 시와 서화의 예술적 정취가 있는 가문으로 자랑스러워했다.

다산 성생이 학자로서의 정밀함과 예술가로서 풍부한 감성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집안 배경에서 엿볼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어린시절 부친의 가르침을 받다가 풍산홍씨와 혼인한 후 서울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성호 이익의 학풍을 계승한 여러 학자들과 교우했고, 성호선행의 유고를 읽으며 일찍이 실용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과거 공부를 위해 성균관에 재학할 때 이미 정조의 지우를 입었다. 

28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규장각의 초계문신에 발탁되었다.

규장각은 정조 임금이 개혁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한 왕실연구기구이다. 

관료생활은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총애를 받았으며 주교사의 배다리 설계, 수원화성과 거중기의 설계 등 혁혁한 업적이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 문제로 금정찰방과 곡산 부사의 외직으로 내몰리기도 하였다. 곡산부사 재직시에는 가좌부제도의 개선 및 '마과회통'의 저술 등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관료기 다산의 업적은 특출한 바가 있었다. 배다리와 거중기의 설계에서도 그러한 점이 보이지만 '전론'과 '원목'에서 피력된 사상이 더욱 그러하다. 다산은 왕전체제하에서도 항상 주민자치를 실현하기를 소원했고 인민 위주의 정치 사상을 주장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23세이던 4월 봄 고향인 마재에서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내려오던 배안이었다. 이 때 함께 다녀오던 큰 형수의 동생 이벽이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고 이때에 비로소 천주 교리를 접하게 되었다. 다산 성생은 이때의 감회에 대해 "배 안에서 천지가 창조되는 시초나 육신과 정신이 죽고 사는 이치를 들으니 황홀하고 놀라워 마치 은하수가 끝이 없는 것 같았다"하고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도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청년 유교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열었던 신앙집회에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고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앙집회가 형조 관헌에 적발되어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났고, 다산이 30세 때 외사촌 윤지충이 천주교 신앙에 빠져 제사를 페지한 일로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신해박해라고 하는데 이후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지하는 금교령이 내려졌다.

"대학에 들어간 뒤로 이벽을 따라 천주교 교리를 듣고 천주교 서적을 보았으며 정미년(1787) 이후 4~5년 동안 마음이 기울었는데 신해년(1791) 이래로 나라의 금지령이 엄중하여 마침내 생각을 끊어 버렸다"고 광중본에서 고백한다.

 

정조의 죽음에도 유배 신분때문에 장례를 가지 못했다.

 

다산의 부안 홍씨의 이름은 혜완이다. 시문에도 능하였다.  다산은 젊은 시절부터 고생을 함께한 아내에 대한 정이 남달랐다. 호박으로 죽을 쑤어 허기진 배 채우며 가난을 견뎌내는 아내였다. 다산은 유배 길에 오르며 한강가에서 아내와 이별할 때 '표정이야 비록 씩씩한채 해도 마음이야 나라고 다를수 있으랴'라고 하여 기역 없는 이별에 애틋한 마음을 남겼다.

강진에서 첫 해를 보냈을 무렵 부인이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위해 옷을 짓고 붉은 찹쌀을 싸서 보냈을 때 할 말을 

잃은 다산은 '그리워라 꿈속의 슬픈 님의 얼굴'이라며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천리 밖 고향망르에 있던 홍씨 부인에게 전할 뿐이었다.

홍씨 부인은 남편이 유배 간 지 6년이 되던 해 겨울 사언시를 지어 보냈다. 시집올 때 가져와 분홍빛이 담황색으로 바랜 치마와 함께였다. 그 시에서 남편을 그리는 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남편과 헤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커져가는 근심, 유배지에 가서 빨래라도 해주고 밥이라도 지어주고 싶은 마음, 자신의 몸은 병들어 다시는 영영 서로 볼 수 없을 것 같은 걱정이 담겼다. 천리 밖에서 찬 겨울을 나고 있을 남편에 대한 부인의 그리움과 남편 걱정에 잠못드는 부인을 생각하며 또 잠못 이루는 다산의 애잔함에서 "매화병제도"는 탄생했다.

 

다산 정약용이 개발한 배다리(위사진)과 거중기(아래 사진)

 

다산 정약용의 저술을 정리한 문집으로 활자본 154권 76책이다.

정약용의 대표적인 저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이른바 1표 2세에서 시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총망라한 문집이다.

외현손 김성진이 편집하고 정인보, 안재홍이 교열에 참가하여 1934~1938년에 신조선사에서 간행하였다. "여유당전서"의 근간을 이루는 6경 4서와 1표2서는 후학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806년 겨울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하던 중 부인 홍혜완으롤부터 편지와 함께 낡은 치마가 보내져 왔다. 바로 부인이 30년 전인 1776년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색 치마로 오랜 세월 탓에 색이 바래 누런 빛을 띠고 있었다.

1810년 다산은 부인이 보내온 치마를 꺼내 자르고 다름질하여 두 아들에게 삶의 방향을 일깨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쓴 글을 4개의 서첩으로 만들어 고향에 있는 두 아들에게 보냈다. 그 중 3개의 서첩이 현전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하피첩"이다.

 

매화병제도는 다산 정약용이 딸을 위해 그린 것으로 활짝 핀 매화가지에 멧새 두 마리가 나란히 앉은 그림이다. 내용에는 다산이 그린 그림과 함께 행서로 쓴 시 한수가 있다.

1810년 하피첩을 만들어 아들에게 보내고 3년 뒤 남아있던 치마조각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적어 1년 전 시집간 딸에게 선물했다.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매화나무 가지 위에 다정스러운 두마리의 새, 그 아래에는 딸에게 주는 시를 썼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남편, 아버지인 다산 정약용의 가족을 향한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을 녹여 보낸 글과 그림이다.

 

목민심서는 목민관인 수령이 지켜야 할 업무지침이다. 당시 폭정에 대한 고발, 목민을 위한 방안 들을 저술한 책이다. 다산은 유배기에 "목민심서"의 집필을 착수했고 해배되던 1818년에 초고를 완성했으며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뒤 수정, 증보를 거쳐 1821년 늦봄에 48권 16책으로 완성했다.

중국과 우리나라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선행 목민관들의 선행과 가언, 목민관이었던 선친의 교훈, 암행어사 및 곡산부사로 스스로 백성을 다스려본 경험, 유배 생활에서 직접보고 들은 내용 등이 정리되어 있다. 책의 구성을 보면 목민관의 책무와 마음가짐 등이 모두 12편으로 나뉘어 있으며 편마다 6개조씩 모두 72개조로 이루어졌다.

 

경세유표는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 토지제도, 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한 책이다. 

처음에는 "방례초본" 이라는 제목으로 착수되었다. 그 서문인 "방례초본"에도 앞머리에 '터럭만큼도 병들지 않는 것이 없는바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다' 라며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자찬묘지명" 에는 저술의 의도와 목적, 내용이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경세란 무엇인가 ? 관제, 군현지제, 전제, 부역, 공시, 청저, 군제, 과제, 해세, 상세, 마정, 선법, 영궁지제 등을 사용에 구애되지 않고 날줄을 서ㅔ우고 씨줄을 엮어서 우리의 오랜 나라를 새롭게 하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고 했다.

조선의 오랜 폐단을 그야말로 혁신할 방안을 국가체제 전체의 차원에서 마련했던 것이다.

 

흠흠신서는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형법서이다. 관료들이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기술이 미약하기 때문에 본인의 황해도 곡산부사와 형조참의를 지내면서 쌓은 실무적 지식과 국내외의 이론 및 사례를 종합하여 편찬하였다. 

사건을 맡은 수령은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사심없이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제목을 "흠흠신서" 라 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 및 직접 처리하거나 관련하였던 사건에 대한 자세한 판례가 설명되어 있다. 총 10책 30권이며 경사요의 3권, 비상전초 5권, 의율차례 4권, 상형추의 15권, 전발무사 3권 등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이 힘들지만 시간이 많아서 많은 저서를 준비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관직에 있었다면 이런 많은 글을 언제 쓸 수 있었을까...

다산은 위기를 기회로 만든 사람이 아닐까..

사람은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다. 나도 경험했지만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기회가 올 때 일어설 수 있다.

 

 

주소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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