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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강진군 가볼만한 곳 : 다산 초당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2.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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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실학을 꽃피운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 중 10여년을 생활하면서 목심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현판에 판각된 다산초당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로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다산초당, 동암, 서암, 천일각 등의 건물과 '다산 4경' 이라 부르는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기산 등의 유적이 있다. 다산초당을 비롯하여 이곳의 다양한 유적을 '정약욜 유적' 으로 통합하여 사적 10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다산초당 건물은 원래 목조 초가였으나 1936년에 노후로 인해 붕괴되어 없어졌던 것을 1957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그 자리에 목조 와가로 중건하였다.

 

주차장에서 300m 를 올라가면 다산초당을 만날 수 있다.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 (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곳은 다산 선생이 초당에서 양성한 18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윤종신(1808~1879) 선생을 모신 묘소이다.

윤종신 선생의 자는 금계, 호는 순암이며 부친은 강진읍 내에서 다산을 모셔온 윤규로이다.

다산 성생께서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삶의 터전을 새롭게 함은 물론 제자들을 문답식으로 지도하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당시 저술은 18인의 제자들의 역할이 컸다. 

다산은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순암을 위해 순암호기를 직접 써 주면서 호연지기를 키우게 했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게 되자 순암은 18인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를 조직해 평생동안 차를 만들어 보냈으며 이 차를 금릉다산향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그는 1867년에 진사가 되었고 1866년 병인양요 때와 1869년에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의병을 모아 참여하였으며 추사 김정희, 백파 신헌구와 교유하였다. 문집으로는 순암총서를 남겼다. 배위 광주 이씨와 함께 묻혀 있으며 현재의 비문은 1914년 성균관박사 이금이 썼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왼쪽에는 보수하고 있었다.

 

다산초당 건물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정성이란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어 자신의 성인 정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산초당 오른쪽에, 동쪽에 있는 작은 건물이 동암이다.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쳔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동암을 따라 오솔길을 걸으면 백련사에 갈 수 있다. 거리를 800m 정도이며 도보로 약30분정도 걸린다.

찌뿌듯한 하늘이 맑게 갠 어느 봄날, 냉이 밭에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자 다산은 자기도 모르게 초당 뒤편 나무꾼이 다니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판이 시작되는 보리밭을 지나며 그는 탄식했다. "나도 늙었구나, 봄이 되었다고 이렇게 적적하고 친구가 그립다니" 백련사에 혜장선사를 찾아 가는 길이었다. 벗될 만한 이가 없는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존재였다.

혜장은 해남 대둔사 출신의 뛰어난 학승이었다. 유학에도 식견이 높았던 그는 다산의 심오한 학문 경지에 감탄하여 배움을 청했고 다산 역시 혜장의 학식에 놀라 그를 선비로 대접하였다. 두 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기기도 했다. 혜장이 비 내리는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동암 바로 오른쪽에 백련사 가는 길 입구에 천일각이 있다.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는 끝 한 모퉁이' 라는 뜻의 천애일각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800m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을 만날 수 있다.

 

 보이는 가운데 건물이 다산초당이다.

정약용은 1808년 봄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은 지난 7여 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에 절친한 혜장이 있었고 다산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6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라고 칭하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당시로 가 보자.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자료 수집, 정리, 정서, 편집 등의 작업어ㅔ 참여하고 다산은 정열적으로 각종 저작을 집필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능력별, 수준별로 지도하고 독려했다. 한가할 때면 계곡과 연못을 거닐고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는다. 다산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조선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

 

다산초당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이 서암이다. 왼쪽에 위치한다.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의 산정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가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다산 정약용 선생(17 62!1836)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과거나 현재나 권력에 의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유배보내어지고 죽임을 당했는가..

오히려 충직하고 정직한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것을 많이 본다.

왜 세상은 아부와 단물에 길들어 졌을까..

동서양이나 과거나 현재나 변함이 없다.

 

 

주소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길 6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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