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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장흥군 가볼만한 곳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2.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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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위치한 석대들 전적은 동학농민혁명의 4대 전적지로 농민군이 참여한 최후의 격전지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내에는 동학과 관련된 각종 책과 무기류 등이 전시되어 있고 전투현장을 느낄 수 있는 영상물과 체험시설들이 구비되어 있다.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구한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장흥 출신 동학농민의 활약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기념관은 동학농민혁명의 4대 격전지 중 하나이자 마지막 결전지인 장흥 석대들에 세워졌는다. 

석대들은 동학농민혁명 전투 가운데 두번째로 큰 규모의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2009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달팽이 모양으로 지어진 기념관에는 영상실과 전시실, 체험학습실이 있고 영상실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하여 장흥 석대들 전투에 관한 동영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전시실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는데 남도장군으로 불리며 최후의 결전을 이끈 장흥 접주 이방언, 전투마다 앞장서 동학군의 사기를 높였던 여성농민군 지도자 이소사 등의 활약상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관람을 마치면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 사발통문에 이름 적기, 장태 굴리기, 동학군 되어보기 등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즐거움을 만낀할 수 있다. 그리고 동학혁명기념관 밖에는 기념탑도 있다.

 

1차봉기는 1894년 음력 1월에 일어났다. 전북 정읍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으로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수백명의 농민들과 함께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신임 군수 박원명은 폐정 시정을 약속했으나 고부 농민 봉기를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는 동학교도를 탄압했다. 

농민군은 고부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와 첫 전투에서 승리하고 장성 황룡촌에서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이 진주성에 입성한 후 정부와 전주화약을 체결했다.

1894년 음력 4월 27일 전주성을 함락한 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할 계획이었으나 청나라와 일본의 군사주둔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정부와 화약을 체결했다. 이를 "전주화약"이라 한다. 전주화약을 계기로 폐정을 개혁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집강소는 동학농민군의 자치행정기관이었다.

집강소에는 서기, 성찰, 집사, 동몽, 들의 직책을 두었는데 이들은 집강의 지휘를 받으면서 치안 및 포교 등을 담당하면서

각군현 단위로 "폐정개혁안"을 실행에 옮겼다. 집강소가 농민군의 자치기관으로 활동함에 따라 농민군은 지역적 차원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 질서를 변화시켜 나갔다. 이는 농민군의 비약적 성장이자 조선사회의 역사적 전진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전봉준으로 하여금 집강소 활동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이 다시 옹립되었다. 나아가 청과 일본이 한반도를 전쟁터로 삼아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자 전봉준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재봉기의 결심을 굳혔다. 바로 2차 봉기이다.

1894년 9월 중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를 부르짖으면서 기포하자 이에 호응하여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다. 10월 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가 한때 약 10만에 가까웠다. 이를  "삼례봉기" 또는 "2차 봉기"라고 한다. 

1차 봉기 때와 달리 충청도에서 최시형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북접도 항일구구투쟁이라는 명분 앞에 공동전선을 폈다. 남.북접은 논산에서 합세하여 공주로의 북상계획을 세웠다. 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0만 명이 공주 우금치에서 조일연합군과 일주일동안 수십 회에 걸친 공방전을 벌였다. 근대식 무기인 소총과 대포 등 우세한 병기에 정규훈련을 받은 조일연합군에 대항하여 분투했으나 동학농민군은 패배하고 논산으로 후퇴했다. 

 

장흥에서는 1862년 5월에 농민들이 봉기했는데 이를 이른바 "장흥민란" (장흥농민항쟁)이라 한다. 전 군수를 지낸 부동면 평화리 고제환을 비롯하여 향유 정방현, 임재성 등의 주도 아래 1,000여 명의 농민군이 봉기하여 관아와 부정한 이서들의 집을 습격하여 불태웠다. 군수까지 지낸 사람이 "민란"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조선 왕실과 정부 역시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만큼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장흥에는 여성 동학지도가 이조이(이소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관군측 자료인 "우선봉일기"와 일본측의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그리고 일본에서 발행한 "국민신문"과 "조일신문" 등에서 확인된다.

"국민신문" 1895년 3월 5일자에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조이라 한다" 고 보도했으며 조일신문에는 "이때 이조이란 여인이 앞장서서 싸워 동학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큰 전과를 거두었다"고 했다. 

이조이는 1894년 12월 17일 옥산촌 전투 이후 관군에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으로 온몸의 살이 문드러져 겨우 목숨이 붙어 있었다. 나주에 압송되어 있다가 일본군 군의고나의 치료를 받기도 했으며 관군이 간호할 남편 김양문을 수소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이조이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동린 또는 최동으로 불리는 어린 소년 최동린은 장흥군 대흥면(현 대덕면) 연지리에서 태어났으며 13세 나이로 농민군을 지휘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석대들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됐다.

그 후 최동린은 나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되어 12월 28일 처형되었다. 이외에도 대흥면 연지리 출신 김유선은 15세 나이로 참전하여 생환했으며 약산면 해동리 박백환도 15세 나이로 참전했다가 살아 돌아왔다.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관군의 철저한 수색이 시작되었다. 당시 약 500명의 동학농민군이 회진면 덕도라는 작은 섬에 숨어 있었다. 덕도까지 관군의 수색망은 좁혀들자 동학농민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시 열여섯살 소년 뱃사공이던 윤성도는 밤을 틈타 목숨을 걸고 덕도에 있던 농민군들을 인근 금당도, 생일도, 약산도 등 다른 섬으로 피신시켰다. 윤선도의 손자 윤병추씨는 "남도 끝까지 쫓긴 동학군의 절박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던 할아버지의 숭고한 정신을 존경한다" 고 말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했다.  

천도교(동학교도)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3.1 운동이 추진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한 만세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대나무를 역어서 만든 장태는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농민군들이 썼던 무기인데 농가에서 닭을 키우던 장태에서 고안하여 이를 크게 만들어 무기로 썼다. 장흥 출신 이방언 장군이 만든 이 장태를 사용하여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관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주입성을 하게 된다.

 

 

석대들 전투가 이루어졌던 곳에 농민혁명기념관을 지었다.

어느 시기나 정치가 부패하고 뇌물이 통용되면 망하기 마련이다. 

조선도 끝나거려니 지방에서는 탐관오리들이 사리탐욕에 눈이 멀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일본눔들이 남의 나라를 먹을려고 하고 있다. 중국대륙을 탐하는데 발판을 삼은 것이다.

농민군과 조일연합군이라니..    조일(조선과 일본)

조선의 관군만 있었다면 아마 농민군이 평정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동학은 1860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이다.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이아.

동학은 교조 최제우가 서교의 도래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나라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1905년에는 손병희에 의하여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수운 최제우의 생가는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산63-1 에 있다.

생가 방문기는 나중에 포스팅 하기로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정부에서 보면 민란이요, 일본눔들이 보면 방해꾼이다.

억압과 부정부패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의 개혁이요 혁명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3.1운동과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민주화는 민초들이 만들어낸것이다.

 

 

주소 : 전남 장흥군 장흥읍 남외리 16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유튜브 검색 "리차드박"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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