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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경남 거제시 가볼만한 곳 : 청마기념관, 생가 (드론 영상)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5.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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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인 청마 유치환은 1908년 음력 7월 14일 아버지 유준수와 어 머니 박우수의 5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로 널리 알려진 동랑 유치 진이다.

유치환의 남성적이고 꼿꼿한 선비 기질은 아버지에게서, 예술적인 기질은 어머 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한다. 청마 유치환은 11세까지 한학을 배웠으며, 어린 시절의 한문 교육은 이후 그의 시에서 빈번한 한자 사용의 바탕이 되었다.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해 1922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도요야마중학교에 입학한다. 동경유학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고 문학에 눈을 뜨게 되는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청마 시의 중심에 자리 잡 고 있는 니체적인 허무주의, 실존의식들과 무정부주의의 성향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1926년 한의원을 하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 년에 편입, 1928년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28년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경성 중앙보육학교 출신 안동 권씨 재순과 결혼하였다. 알고 사귄지 10년 만의 일이다. 인전, 춘비, 자연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1930년 『문예월간』 제2호에 시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때 청마는 통영, 부산 등지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이육사, 이상, 정지용, 김소운 등과도 친밀 하였다. 1937년 당시 시단을 풍미했던 정지용의 시에 감동하여 형 유치진과 함께 동인 지 『생리』를 발간,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9년에는 <깃발>이 수록되어있 는 첫 시집 『청마시초』 발간과 더불어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1957년에는 한국 시인협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청마 유치환은 시인으로, 또 교육자로서 평생을 보냈다. 결혼 후 평양, 부산을 전전하던 청마는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40년 3월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농장경영을 하겠다고 가족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농장 관리인으로 지내는 한편 정미소를 경영했다.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된 여러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 북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들이다. 1945년 광복 직전인 6월, 귀국해 부인은 통영 문화유치원을 운영하고 유치환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했으며, 10월에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통영여중을 시작으로 경남고, 경남안의중, 경주고, 경주여중고, 대구여고, 경남여고 등에 서 교사와 교장을 역임했으며, 1967년 2월 13일(당시 60세) 부산남여상 교장 재임 시 문인협회 참석 후 귀가 중 부산 좌천동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한국문단의 거목이다.
청마는 1939년 『청마시초』에서 사용된 호가 청마로 굳어지게 되었다. 청마의 호 유 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노작 홍사용이 유치환의 얼굴을 보고 자네 얼굴이 마면 (말상)이니 청마라 함이 좋지 않을까 했다는 설과 차영환 시인의 주장과 같이 울릉도, 파 도와 같이 바다에 관한 시가 많은데 스스로 푸른 갈기를 세우고 오는 파도의 이미지를 형상화 하여 청마라 했다는 설이 있다.

 

 

청마 유치환을 이야기할 때 시조시인 이영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부남 국어교사 였던 유치환과 21살 젊은 나이로 딸 하나를 키우던 가정교사 이영도는 통영여중에서 같이 일하게 된다. 청마와 이영도의 사랑은 세기의 어느 사랑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들 만큼 긴 편지를 쓰며, 20년간 사랑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20년간 5천여통의 편지가 오갔으며 1년에 250통 가량을 쓴 셈이 되니 3일에 한 번씩 쓴 것이다.

청마는 생전에 "절도없는 애정의 방황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유부남이던 자신과 과부였던 이영도와의 사랑이 꽤나 괴로웠던 모양이다. 청마 사 후 이영도는 청마에게 받은 수천통의 애정편지를 정리하여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 네라』라는 애정 서간집을 발간하였다. 1968년 비소설 부문에서 베스트셀러였다. 단행 본으로는 유래가 드문 2만 5천부의 판매 부수를 올렸다. 1966년 12월 31일자 편지에 는 청마가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의 편지를 정리해 곱게 책을 냅시다요...' 많은 문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간집을 낸 것은 청마 생전의 바람을 이영도가 이룬 것으로 보인다. 천재시인의 메마른 영혼에 예술적 혼을 불어 넣은 여인이 이영도가 아닌가 싶다.

 

 

청마기념관이다. 청마 유치환선생이 이곳 둔덕면 방하리에서 태어나 2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 그의 생가와 기념관, 묘소가 있다

 

 

해방이 되던 해 내가 청마를 처음 찾아갔을때 그는 마루 끝에 걸터 앉아서 점심 상을 받고 있었다. 곁에는 한 되짜리 청주 병이 놓였고 그는 반주로 대접에다 술을 따르고 있었다. 나도 할말이 별로 없었거니와 그의 술 마시는 격식만 보고 이렇다 할 한마디의 말도 들어보지 못한 채 나는 그의 집 대문에 빠져나왔다. 빠져나오자 세상에 저런 답답한 사람도 다 있구나! 하고 나는 산숨을 다 쉬었다. 그런 바위 같은 모습이 청마의 것이다. 그러나 왠지 거의 신변에는 싸늘한 기운은 감돌지 않았다

-김춘수의 [꽃과 여우]에서 

 

죽음과 실어증에 시달리던 미당이 부산의 청마 집을 찾아왔다. 대마도가 보이는 임시가거였다. 이 무렵의 정황을 조지훈은 그의 시 [청마우거유감]의 어필로그에서 '경인동란에 통영이 적군에 점령되자 청마는 부산 복병산하에 우거해 있더니라, 삼면이 포위된 대구에 같이 있다가 발명한 미당이 여기 와서 정양하고 있으니 때는 9.28직전이라 내 잠시 여기 찾아와 셋이 함께 날을 보냈더니라'고 적고 있다. 미당은 이때의 기억을 '그는 그의 부인과 딸들을 시켜 거의 날마다 장을 보아 오게 해서는 나를 칙사처럼 극진히 대접'했다는 것이다. 청마의 따뜻한 인간미가 눈물 겹도록 묘사되어 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이 지낸 과거 마을을 조형물로 만들었다.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7번지에서 1908년 음력 7월 14일 유생인 아버지 진주유씨 준수와 어머니 밀양박씨 우수 사이의 8남매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장남은 극작가 동랑 치진, 한의였던 그의 부친은 유치환의 나이 3세때 경남 통영시 태평동 500번지로 이주하였다.

 

1928년 21세때 연희전문학교 문과 1학년 중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학원에 다닌 일이 있다. 이해 10월 11세때부터 알고 지내던 경성 중앙보육학교 출신인 안동 권씨 재순과 결혼하다.

 

 

1967년 (60세) 2월 13일 하오 9시 35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자동차 사고로 부산대학병원 이송 도중 영면했다.

장지는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 기슭이었으나 경남 양산시 백운공원묘지로 이장, 다시 1997년 4월 5일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지전당골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유민영 교수는 [동랑 자서전]에서 청마가 태어난 고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둔덕은 통영읍 나루터에서 목선을 타고 한 시간 가량의 거리에 있는 커다란 섬으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분지와 같은 곳이다. 마을 앞에는 폐왕성이 있는 우두봉이 가로막고 뒤에는 산방산이 받치고 있어서 마치 삼태기 같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한촌이 바로 둔덕골이다"

청마는 1908년 음력 7월 14일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에서 아버지 유준수와 어머니 박우수의 8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아명은 돌처럼 단단하고 산처럼 여물어 오래오래 살라는 뜻에서 "도메"라 불렀다. 청마의 외가는 거제에서도 갑부였는데 키가 원칠하고 말이 적고 얌전한 청마의 아버지 유준수를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청마의 아버지 유준수는 그의 외양과는 달리 얌전하고 내성적인데 비하여 그의 어머니 박우수는 성격이 활달하고 마음이 넉넉하여 유머를 잊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청마의 꿋꿋한 선비정신은 유생인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청마의 넉넉한 마음과 유머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청마가 열한살때 여황산 아래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외할아버지의 한문서당에서 얼마간 한문지식을 익혔다. 그는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자 부산 부두에서 밤 연락선을 타고 가형이 있는 일본 도쿄를 찾아가서 형이 다니는 부잔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때 형 치진은 3학년이었다.

청마의 나이 열 다섯 때인 1922년의 일이다. 그는 부잔중학 1학년에 들어가자 학교공부보다 형의 꾸지람까지 들어가면서 문학서적을 탐독하였다. 청마의 글 [우연히 시인이 되었다](조연현 엮음), [작가수업]에 따르면 일본의 다카무라 고타로와 하기하라 사쿠타로 그밖에 아나키스트 시인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청마는 1926년 부잔중학교 4학년때 아버지께서 무슨 사업을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사업이 순조롭지 못하여 귀국하게 된다. 형 치진과 아우 치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청마의 평생 동지인 하기락이 쓴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전편, 형설출판사 간)를 보면 1926년 9월의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후 조선 유학생들 간에 아나키즘적 혁명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일본 내에서는 [흑우회]등 각종 지하단체가 조직되어 [흑우회]의 하부조식에 해당하는 [계림장]에는 아우 치상과 [학생연맹]에는 형 치진이 가담한다. 그러나 청마가 귀국한 뒤의 일이니까 이러한 지하조직에는 청마의 이름은 빠져 있다. 그러나 평생동안 유림(무정부주의자. 중국에서 임정요원을 지냄)과 하기락(무정부주의자, 경북대학 철학과 교수를 지냄), 박노석(무정부주의자, 시인)과의 평생 동지로서 친교를 맺은 것을 보면 그는 사상가로서 아니키즘의 일면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의 사상가로서의 면모는 그의 시집 [예루살렘의 닭]이나 [동방의 느티] 속에 있는 [단장]' [단상] 사후에 하기락과 공편한 [사랑과 모랄과 진리]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는 귀국하자 곧 동래고보 4학년 2학기에 편입하게 된다. 이 무렵 쓰여진 [단가]가 있는데 이 작품은 향리 통영에서 발간된 [참새]동인지에 그의 형 유치진이 번안한 희곡과 나란히 실려 있다. 이 작품은 단시형식을 빌린 것인데 특별히 기교란 것도 없고 명상 속에서 자연과 동화하고 싶은 심정을 읊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적 상상력은 뒤에 대가시인으로서 우주와 교감하는 시편을 낳게 된다.

 

 

해방후 우리말로 만들어진 동래고등학교 교가는 김소운 작사로 되어 있었다. 그 후 김소운은 무슨 이유로 말미암아 김소운이 작사한 교가를 부를 수 없게 되어 동래고 출신인 청마에게 작사를 부탁하여 교가 가사를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5.16 후 김소운이 일본에서 귀국하게 되자 이때 청마는 문단의 선배인 김소운이 작사한 교가를 청마 자신의 가사로 바꾼 것을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학교 당국에 본래의 가사로 되돌리기를 부탁하였으나 학교 당국은 개인 사정을 들어 줄 수 없다하여 청마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뒤에 김소운이 이 소문을 듣고 청마의 자상함에 너무 고맙게 여겼다는 것이다. 청마가 작사한 교가는 지금까지 불리워 내려오고 있다.

 

 

청마가 대구여고에서 부산 경남여고 교장으로 전임한 것은 청마의 나이 56세, 1963년의 일이다. 청마가 부산으로 이주하게 되자 평소 그의 원만한 성격과 서민적인 기질을 잘 아는 부산의 문우들은 부산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기대하며 크게 환영했다. 그리고 청마가 이주한 다음해 부산의 문우들은 부산문단의 화합과 장래를 생각하여 그에게 부산문인협회 회장 자리를 떠맡겼다. 1년 있다가 그에게 다시 예총 지부장까지 겸하도록 하였다. 부산의 문우와 예술인들은 이 거인의 그늘에서 안도와 화합하는 분위기가 얼마간 계속되었다.

 

 

웃대에는 자주 눈이 내리는 모양인데 여기는 새해 들어서도 연일 조금 흐렸다가 벗겨지는 날이 있을 뿐 맑은 날씨가 계속이다. 그래 이상건조라고 산불 들을 조심하라고 측후고의 경고까지 나돌고 있다. 이 겨울엔 내 건강이 아무래도 좋지 못해 조금만 등이 시리다고 느끼기만 하면 코가 막히곤 하는데도 북녘의 면 산에 백설이 얹힌 원경이 몹시 그리워진다.

- 청마의 마지막 일기(1967년 1월 12일) -

 

 

왼쪽에 청마 생가가 있고 오른쪽에는 청마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그 왼쪽에 주차장이 있다.

 

 

청마 기념관이다.

 

 

청마 생가이다.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인 청마 유치환은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7-5번지인 이곳에서 1908년 음력 7월 14일 아버지 유준수와 어머니 박우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청마선생은 11세까지 한학을 배웠으며 일본 토쿄 토요야마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운이 기울어져 귀국, 1926년 동래고등보통학교 5년 편입 후 1927년 연희전문학교를 수료하였다.

1931년 문예월간 제2호에 시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한 후 1937년 당시 시단을 풍미했던 정지용의 시에 감동, 형 유치진과 함께 동인지 '생리'를 발간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발간과 더불어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쳐 온 결과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경상북도 문화상 및 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1957년에는 한국 시인협회장에 피선되었으며 경주여중고, 경주고, 경남여고 교장을 거쳐 1967년 부산남여상 교장 재임시 부산 좌천동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한국 문단의 거목이다.

선생의 작품은 허무를 극복하려는 남성적, 의지적인 시향으로 사람의 삶 어디에나 있는 뉘우침, 외로움, 두려움, 번민 등의 일체로부터 벗어난 어떤 절대적인 경지를 갈구했으며 그 해결의 길을 일체의 생명적인 경지를 갈구했으며 그 해결의 길을 일체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자각에서 찾고자 했다.

저서로는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청마시집(1954)' 등 12권의 시집과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깃발' 을 비롯한 작품의 소재를 청정해역과 천년의 절경을 간직한 거제의 모습을 담았고 '거제도둔덕길'은 8대로 살아온 고향임을 청마가 잠들어 있는 인근 선영 지전당골의 모친 묘비에 있는 '사모곡'의 내용에는 "멀지 않아 제 또한 당신 곁에 당신 모셔 이 하늘 우러르고 묻힐 날을 기약하오매"라는 간절한 염원이 깃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출생기' 에서는 열나흘 새벽달빛을 밟고 유월이가  이고 온 왕고모댁의 제삿밥을 먹고 난 후 자신이 태어났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등 출생지인 이곳 거제도 둔덕골에 대한 애틋한 향수가 청마의 작품 곳곳에 나타나 있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유튜브 검색 "리차드박"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경상남도 거제시 둔덕면 방하2길 6 (청마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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