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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경남 거제시 가볼만한 곳 :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드론 영상)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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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해전 또는 칠천 해전은 1597년(선조 30) 8월 27일 칠천도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등이 도주 중 전사하며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수군은 대부분 사망했다.  이 전투는 한국사 5대 패전중 하나이다.

1597년 3월 1일 임진왜란을 종결시키기 위한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조선의 부산을 재침략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군이 웅천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다. 같은해 8월 20일 일본의 후속부대가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하였다. 

 

 

1597년 8월 26일 100척이 훨씬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수군을 총동원한 원균은 12척의 판옥선을 잃어 버리고, 일본의 기습을 받아 400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한다. 

원균의 동생이자 부장인 원전은 형을 대신해 병력을 지휘하여 싸우다 전사했다.

거제도 서쪽의 작은 섬 칠천도 남쪽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야습을 당한 후 이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계속 퇴각한다. 원균은 도망치다가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일본군들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결과로 12척의 판옥선을 제외한 판옥선들은 전부 침몰하였다.이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하므로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후 1597년 5월 16일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으로 출옥하여 전쟁에 임한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승리한다.

칠천량해전에서 일본수군은 100명, 조선 수군은 20,000명을 잃었다.

 

 

칠천량 해전 기념관이다.

 

 

칠천량 해전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도도 타카톼 등이 지휘하는 일본 수군에 의해 1597년 7월 16일 새벽 칠천도 앞바다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것이다. 

임진왜란 내내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조선 수군은 이 때에 처음으로 충격적인 패배를 겪는다. 이 패배로 인해 임진왜란의 전체적인 흐름이 뒤집어졌으며 조선 민중은 일본군이 저지르는 학살과 약탈 등 온갖 만행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지만 끝내 조선을 정복할 수 없었다. 특히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무적의 조선 수군이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싸우기만 하면 패배했다. 1592년 한 해 동안 이순신에게 격파 당한 일본 수군의 전선은 무려 300척이 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쩔수 없이 조선 수군과 전투를 피하고 남해안 일대에 방어용 성을 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1593년의 남해안 일대에는 18개의 왜성이 축조되었고 일본군은 이 왜성에 주둔하면서 조선 수군과의정면승부를 피했다.

 

일본은 복수를 준비한다.

조선 수군과의 큰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육군 중 일부를 수군에 편입시켰으며 일본 각지에서 수군을 징벌하였다. 또 일본 전국에서 배로 만들기 적합한 나무가 있으면 바로 채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선박 건조용 철을 확보하기 위해 대장장이에게 낫과 호미 외에는 철 제품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이런 노력을 통해 일본 수군은 임진왜란 초기보다 훨씬 강해진 전투력을 지니게 되었다.

 

 

원균(1540~1597)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수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라는 선조의 명을 받게 되었다.

원균도 통제사가 되기 전에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수군이 단독으로 바다에 나아가 일본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원균은 통제사가 되고 난 뒤 수군 단독으로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원균은 조선 육군을 동원하여 앞세우고 수군의 그 뒤를 따라 진격하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선조는 원균에게 계속 수군이 단독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원균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갔으며 칠천량의 패전은 그렇게 비롯되었다.

 

 

다시 쳐들어온 일본군은 발길을 디디는 곳마다 대량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으며 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특히, 조선 군사와 백성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가지고 가는 잔인한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조선 여성들 중에는 일본군의 만행을 피해 자결하는 경우도 적지 얺았다. 

유린당하는 백성들의 이야기는 조경남의 [난중잡록]과 케이넨의 [조선일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원균 선무공신교서는 선조 37년(1604)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서 왜군과 대적하여 크게 이기고 정유재란 때 통제사가 되어 적선을 물리치다 장력하게 전사한 원균에게 공신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신교서이다. 임진왜랑에 공이 있는 무신들을 선무공신이라 한다.

1등 공신을 보니 이순신, 권율, 원균..

모두 지휘관들이다. 

원균은 도망가다가 매복해 있는 일본군에 의해 죽었는데.... 오히려 싸우다가 전사한 원균의 동생 원전에게 주어야 할듯..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벌인 해전 가운데 유일하게 패한 해전이나 전쟁의 원인과 참상, 영향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역사에 대한 통찰과 반성,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기게 한다. 또한 전쟁의 상흔을 돌아보며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조선 수군의 지휘관은 조선시대 각 도의 수군을 통솔하던 정3품 외관직 무관이다.

수영을 주재하며 수사라고도 하였으며 임기는 2년이었다.

수병은 조선시대 각 도 수군의 일반병사로 수병이라고 하였으면 복무기간은 1년6개월이었다. 육군병사에 비하여 업무 강도와 군역의 강도가 다소 강하였다.

의병은 일정한 거처 없이 해상을 떠돌면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로 비상시엔 수군에 편제되었고 활을 잘 쏘며 노젓기에 능했다고 한다.

 

 

 

칠천량 해전이 이루어졌던 칠천도에 칠천량해전공원과 전시관이 있다.

예전부터 나라의 평화는 유비무환에서 시작된다.

전쟁이 없다고 안일무사하면 막상 전쟁이 났을때 패하게 된다. 

 

1591년(선조24)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상반된 보고를 하는 등 당시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황윤길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고 하고 김성일은 '그러한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라고 했다.

정사로 임명한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부사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당시 동인이 권력(여당)을 쥐고 있었다. 황윤길은 정사였지만 야당이었기 때문에 우유부단했고 김성일은 사절단 2인자였지만 집권세력이었기때문에 당당했다. 정사와 부사는 1590년 3월 한양을 출발해 이듬해 1월 귀국할 때까지 10개월 내내 대립했다. 

 

동인 소속 김성일이 서인 황윤길의 보고에 어깃장을 놓아 반대 의견을 낸것이다. 당쟁이 빚은 결과이다.

문제는 당신 집권세력이 동인이었다. 집권당파는 동인 소속 김성일의 말을 따라 일본의 도발 가능성을 낮춰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당신 대마도의 요시토시와 겐소가 조선통신사를 따라 한양에 왔는데 그들은 내년에 조선을 침략할것이란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즉, 명나라에 처들어갈것인데 조선은 길을 터주고 도와주라는 것이다.

그들은 접대한 조선의 선위사 오억령이 그 첩고를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은 오억령의 보고를 무시했다. 오히려 그를 선위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상황은 오억령이 보고한대로 되었다.

 

선조는 좋은게 좋은 것이라고 안이함에 빠졌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김성일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비관적으로 전망한 황윤길의 보고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설령 전쟁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준비했다면 어땠을까...

 

* 율곡 이이가 병조판서 재직 중 1583년에 올린 시무육조에는 군사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병력 양성은 양반계층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선조실록)

이이의 충성심과 혜안을 볼 수 있다. 

그후 이이의 제자 김장생이 1597년 기록 정리한 율곡 행장에 십만대군 양병설을 기록한다.

경연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에서 선조 임금에세 아뢰기를 "10만의 대군을 양성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장차 큰 화를 입는 왜란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이의 혜안대로 9년이 지나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2차에 걸쳐 약 7년동안(1592.4.13~1598.11월) 백성들과  군인들이 고통받고 죽었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유튜브 검색 "리차드박"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칠천로 26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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