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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북 부안군 가볼만한 곳 : 반계 선생 유적지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1.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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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에 있는 조선후기 실학자 반계 유형원 관련 집터이다.

조선시대 실학의 선구자인 유형원이 낙향 이후, 평생 연구생활에 몰두하며 살던 곳으로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위치한다. 우동리는 반계 유형원이 살던 곳이라 하여 일명 ‘반계 마을’이라고 불렀고 예전에는 ‘우반동(愚磻洞)’이라고도 했다.

유적지 일대에는 반계정(磻溪亭), 반계서당(磻溪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린 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 거주하며 평생 학문 연구에 힘을 쏟아 『반계수록』를 저술하였다. 한편 우반리 마을에는 유형원이 팠다고 전해오는 우물이 최근에 복원되었고 유적비도 건립되었다. 1963년 1월 21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유형원(柳馨遠)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덕부(德夫)이다. 1622년(광해군 14)에 서울 정릉(貞陵)에서 태어났다. 1653년(효종 4)에 조부 유성민(柳成民)을 따라 부안현 남쪽 기슭 우반동으로 옮기고 이곳의 지명을 따서 자신의 아호를 반계(磻溪)라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고, 또 몸소 연구한 것을 실생활에 실천해 보았다. 그의 사상과 이념, 이상 국가 건설을 위한 구상 등은 우리나라 실학사에 길이 남을 『반계수록(磻溪隧錄)』 26권에 그대로 실려있다. 『반계수록』은 1770년(영조 46) 왕의 특명에 의해 간행되어 오늘날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조선 실학파(實學派)의 조종(祖宗)을 이루었다. 조선의 실학이 이곳 전라도에서 싹트게 된 것도 반계가 이곳에서 많은 후진과 주민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에 그가 거주한 건물은 없어졌고 기와편과 초석만 발견된다. 1974년 이곳의 군민과 정부의 지원으로 ‘반계 유형원선생 유적비(磻溪柳馨遠先生遺蹟碑)'가 건립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반계선생유적지(磻溪先生遺蹟址))]

 

 

반계선생의 유적지에는 우물터가 3군데 있다.

이것은 유적지 가는 길 왼쪽에 있다.

 

반계선생 유적지와 유적비

 

반계 류형원. 반계선생은 1622년 한성에서 태어나 양평, 여주를 거쳐 과천에서 살다 32세(1653)ㄸ 가족과 함께 이곳 우반동으로 이사하여 1673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살았다.

선생의 자호인 반계는 우동리의 옛 지명인 우반동에서 따왔다.

우우반동에는 선생의 8대 할아버지인 류관이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받은 토지가 있었으며 15세때 이땅의 일부를 팔 때 할아버지를 따라와 작성한 토지매매문서가 보물 제900호(부안 김씨종중고문서)로 지정되어 있다.

33세(1654)때 진사시에 급제했지만 당시 과거제의 폐단이 극심한 것을 보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이후 고금의 전적 1만여권을 보면서 현실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학문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여 실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반계수록"은 선생이 이곳에 살며 20여년 간에 걸쳐 지은 책으로 26권 1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성리학에서 신선술에 이른 많은 책을 썼으나 "반계수록"과 "군헌제"만 전해지고 있다.

 

반계선생, 실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우다.

실학의 의미

조선후기사회(17,18세기)에서 전통의 사회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려는 사상체계로 주자학등 관념적인 학문에 대하여 읽기 쓰기. 셈하기 들의 실용적인 학문 기술, 농공상의 실제적인 지식을 실학이라한다. 실학이 융성하던 시기는 영조, 정조, 순조 때였다.

발생배경

왜란과 호란을 치르는 동안에 나타난 통치 질서의 모순과 조선사회의 지도이녀인 주자학이 전후 부조리를 제거하지 못한 반성과 반발로 전후 민중 사회의 개혁의 필요성 및 발전상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 실학자

실학의 선구자는 이수광(1563~1628), 김 육(1580~1658)등으로 학문적인 기초를 다졌고, 반계 류형원(1622~1673)이 실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저서는 "반계수록"이 있다.

실학이 학파로 성립하는 데에는 성호 이 익(1681~1763)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저서는 "성호사설"이 있다. 실학사상의 융성기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활약한 시기로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저술을 통하여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학은 개항 이후에는 개화사상으로 연결되어 이후 우리나라의 근대 사상에 있어서 하나의 맥락을 이루었다.

 

반계선생 유적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이다.

이 터는 조선 효종(1649~1659)과 현종(1659~1674)때 실학자로 활동한 류형원(1622~1673)이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던 곳이다. 반계라는 호로 더욱 널리 알려진 류형원은 병자호란(1636) 이후 서울을 떠나 여러 곳을 옮겨 살다가 효종 4년(1653) 선대의 자취가 남아 있는 변산반도 기슭의 이곳 우반동으로 이사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뛰어난 학문으로 여러 차례 벼슬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평생을 야인으로만 살았으며 농촌을 부하게 하고 백성들의 사람을 넉넉하게 하는데 학문의 목적을 둔 사람이었다. 조선후기의 수많은 실학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반계수록"이 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실학자인 반계선생이 이곳 우반동에서 살며 국정 전반의 개혁어ㅔ 대해 20여 년 간에 걸쳐 지은 책이 "반계수록"이다.

26권 1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내용은 전제, 교선, 임관, 직관, 녹제, 병제 등으로 되어 있다. 

전제는 토지소유에 관한 것으로 균전제를 교선은 인제 교육과 선발에 대한 것으로 공거제. 임관은 관료제 운영에 대한 것으로전문 관료제를, 직관은 통치기구에 대한 것으로 중앙은 영의정 중심으로 효율성을 높이고 지방관의 권한을 늘리자고 하였다. 또한 녹제는 녹봉에 대한 것으로 모든 관리의 급여제를 병제는 국가방위에 대한 것으로 병농일치를 주장하였다. 속편에서는 노비 세습제 폐지와 군현제 정비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여러 개역론은 소농민, 상인 등 피지배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혁신적 구상이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반계수록》(磻溪隨錄)은 1670년(현종 11년)에 완성되어 1769년(영조 45년)에 간행된 반계 유형원의 대표적인 저술로서 국가체제에 관한 책이다. 총26권. 유형원의 만년의 저작으로 20년에 걸친 연구와 탐구를 토대로 49세에 집필을 완성하였다. 젊은 시절 지방을 자주 유람하면서 직접 목격한 민생의 현실, 그리고 말년에 그가 은거하던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愚磻洞)에서 농민과 더불어 생활하며 얻은 제세구민론(濟世救民論)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반계'는 유형원이 살던 우반동의 이름에서 따온 그의 호이며,

'수록'이란 '붓 가는 대로 갈겨 쓴 글'이라는 저자의 겸손이 담겨있다.

 

반계선생 유적지와 반계서당은 거리가 있고 따로 있다.

반계서당에 가보자

 

반계선생은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선조(조상)가 이곳에서 살아서 이곳으로 낙향한듯 하다.

그런데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다. 52세..

 

실학의 학문

실사구시 : 실지의 일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다

 

오른쪽에 임도를 따라가도 되지만

새로 만든 길을 따라 올라갔다.

 

반계정과 반계서당

 

반계서당

마을에서 450m 정도 산으로 올라가면 있다.

 

반계서당 밖에 우물이 있다.

 

반계서당 내부 오른쪽에 우물이 있다.

 

반계서당에서 왼쪽길을 따라 가면 반계유형원의 묘가 있다.

 

 

아쉬운 점은 안내표지판에는 생가가 표시됐는데

현재 이곳에 그가 거주한 건물은 없어졌고 기와편과 초석만 발견된다.

그래서 생가 장소는 발견하지 못했다.

실학의 중요한 

 

 

주소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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