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전남 해남군 가볼만한 곳 : 고산윤선도 유적지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1. 11. 27.
728x90
반응형

윤선도(尹善道, 1587년 7월 27일) 조선국 한성부 출생~1671년 7월 16일 조선국 전라도 해남군 보길도에서 별세.)는 조선국 의금부 금부도사 겸 통덕랑 등을 지낸 조선 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 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양용의 외5대조부이다.

정철, 박인로, 송순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오우사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인 어부사시가로 유명하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고,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 영창대군의 옥사 등과 북인(北人)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30세에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규탄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경상도 기장(機張)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인조 1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후 인조 반정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봉림대군, 인평대군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되었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 6년)부터는 세자시강원문학으로 발탁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주차장 밑에 있는 정원

 

그는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효종, 형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유배지에서 가사문학과 저서를 남긴 송강 정철, 20여 년간의 유배지에서 수십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등과 비견된다. 그의 학문과 시맥은 이서우를 통해 성호 이익과 채제공에게로 이어졌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되고,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 7월 16일(현종 12년) 전라남도 해남군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85세였다. 서인들은 현종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뺐고, 현종개수실록에 그의 졸기를 실었지만 '윤선도가 죽었다' 라는 몇 글자만 실어놓았다. 그해 9월 22일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 아래 문소동(해남군 현산면 문소동과 해남군 삼산면의 경계 지점)에 안장하였다.

그는 치열한 당쟁 때문에 일생을 거의 귀양지에서 보냈으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많은 시가를 지었다. 그의 작품은 《고산 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 1675년(숙종 1년) 남인이 집권하자 죄가 풀려 신원되고, 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시문을 지으며 소일하였다. 한편 오지의 학동, 청년들을 데려다가 글을 가르치기도 했고, 자발적으로 그의 문하에 찾아와서 배우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는 수시로 가족에게 서신을 보냈다. 유배 중이던 윤선도는 과거에 낙방한 아들에게 “부지런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하늘이 돕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며 “하늘의 도움을 구하려면 선행을 쌓고 어짊을 베풀어 복을 받는 수밖에 없다”며 다독인다. 유배지에서 보낸 또다른 편지에서 그는 자녀들에게 편지를 보내 근검절약할 것을 권한다.

 

"나는 50세가 넘어서야 면주옷이나 모시옷을 처음 입었는데, 시골 있을때 네가 명주옷을 입은 것을 보고 몹시 불쾌했었다. 이언 복식은 모름지기 물리쳐 가까이 말고 검소한 덕을 숭상하도록 하여라"

 

고산 윤선도는 함경도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기대아서(寄大兒書)'에서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뜻은 가풍으로 이어졌다.

 

가풍..

백성을 사랑한 종가...해남 윤씨

 

녹우당은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남자가 머무는 곳이다.

현재 종가의 사정으로 녹우당 내부는 관람 불가이다.

 

충현각

녹우당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있다.

 

녹우당 입구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00년이다.

 

녹우당 입구.. 

녹우당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앞마당에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효종이 스승인 고산에게 하사하신 경기도 수원시에 있던 옛집을 1668년에 이곳으로 이축한것이다. 

녹우당은 현재 해남 윤씨 종손이 생활하고 있어서 그런지 안쪽에는 출입불가이다

 

녹우당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고산 사당이 나온다.

 

고산사당은 고산 윤선도(1587~1671)를 배향하고 있는 불천지위 사당이다. 고산 사후인 1727년(영조3년)에 불천지위로 지정되었다. 불천지위는 안사당에서 모실 수 있게 하고 있으며, 보통 나라에서 공이 인정될 때 허락한 신위이다. 매년 음력 6월 11일 이곳에서 기제사를 지낸다.

 

고산사당 왼쪽에는 어초은 윤효정 사당이 있다.

어초은 사당은 윤효정(1476~1543)을 배향하고 있는 불천지위 사당이다. 윤효정은 덕음산 아래 이곳 백련동에 처음 터를 잡고 해남윤씨가를 중흥시킨 인물로 사당 뒤에는 윤효정의 묘가 있다. 녹우당 공간에서 어초은 제각, 어초른 묘와 함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윤효정은 '삼개옥문 적선지가'라 불리게 할 정도로 적선을 실철하며 가문을 빛내게 하였다. 매년 음력 11월 15일 시제사를 지낸다.

 

 

고산윤선도유적지는 고향인 해남에 위치하는데 

당파싸움에 밀려 젊은 나이 30세에 유배 생활을 시작한다.

유배를 갔다 풀려났다.. 유배를 갔다 풀려났다.. 반복한다

효종과 현종의 사부가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남인이 정치를 잡으므로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그리고 85세에 사망한다.

 

자신의 신념으로 옳은 일은 주장해도 정치의 폐해로 상소는 오히려 자신에게 피해를 입는다.

정치는 조선시대가 더 무서운 시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자신의 당과 뜻이 맞지 않으면 유배.. 심하면 죄를 뒤집어 씌어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낙향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주소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