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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해남군 가볼만한 곳 : 고정희 생가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1.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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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에서 태어난 고정희(高靜熙)[1948~1991] 시인은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 「부활 그 이후」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91년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름다운 사람 하나』, 『눈물꽃』, 『지리산의 봄』, 『광주의 비』 등 10권의 시집을 발표하였고 유고 시집으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가 있다. 고정희 시인의 시 세계는 한국 문학사에서 여성주의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정희 시인은 대한민국의 성차별 문화를 극복하고 진정한 민주사회를 앞당긴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창간된 『여성신문』의 초대 편집 주간과 남녀노소가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대안 사회를 모색한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 ‘또 하나의 문화’ 동인 활동 등을 통해 페미니즘운동의 선구자로 평가 받고 있다. 고정희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해남군청, 해남여성의소리 등이 후원하는 고정희문화제는 시인의 삶과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고 시인이 걸어왔던 삶을 돌아보고자 매년 6월초에 개최하고 있다.

 

고정희문화제는 1991년 세상을 뜬 시인의 기일을 전후하여 매년 추모제를 열어 온 또 하나의 문화 동인들의 추모 기행에서 비롯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1년 6월 또 하나의 문화 동인들이 해남을 찾아 고정희 시인 10주기 추모제를 지낸 이후 2002년 6월에는 또 하나의 문화 동인들과 지역 여성운동 그룹인 ‘해남여성의소리’, 해남 ‘땅끝문학회’가 함께 시인을 추모하며 제1회 고정희문화제를 열었다. 2004년 땅끝문학회와 해남여성의소리가 고정희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행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한편 고정희문화제를 향한 청소년들의 관심이 점차 높아져 2003년부터는 문화제 행사에 참여하는 청소녀들과 해남 지역 청소녀들을 대상으로 페미니즘 정신을 심어 주고 여성문학을 이끌어 갈 여성 문학인을 양성하기 위해 ‘땅끝소녀백일장’을 개최하였다. 2004년부터는 시인의 뒤를 잇는 차세대 문학인을 발굴하기 위해 전국 단위 규모로 확대하였으며, 2006년부터는 만 16세부터 만 18세에 해당하는 남녀 청소년 모두 참여 가능한 ‘고정희청소년문학상’을 제정하고 1위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하고 있다.

 

고정희문화제는 매년 6월초 해남군 삼산면의 고정희 시인 생가와 묘소 일원, 해남문화원, 미황사 등지에서 열린다. 고정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행사는 영화 상영과 ‘사랑과 해방의 페미니스트 고정희의 삶과 문화’를 주제로 하는 강연이 개최되고 미황사에서는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고정희 생가와 주변에서는 시인의 유품 및 육필원고, 시인 생전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고정희 묘소에서 열리는 추모제는 행사의 절정을 이룬다. 2018년에는 제17회 고정희문화제가 6월 6일부터 9일까지 고정희 생가와 땅끝순례문학관, 해남공원 등지에서 펼쳐졌다. 제17회 고정희문화제는 ‘뜨락에서 함께하는 노래와 시’를 주제로 열렸다. ‘여성주의 문학의 선구자 고정희’라는 주제로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 열린 김경윤 시인의 강연에 이어 해남공원에서 이의영 작가의 고정희 시화전이 열렸다. 6일에는 가족 단위로 해남공원을 찾은 지역 주민과 문화제 참가자들이 고정희 시를 직접 적어 볼 수 있는 부채 만들기 체험 행사도 펼쳐졌다. 또 고정희 시인의 시를 낭송하고 노래하는 포엠콘서트가 열렸는데 작곡가 한보리가 새로이 곡을 입힌 고정희 시 노래들이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행사 마지막 날에는 전국에서 모인 추모객들이 헌화와 헌주, 헌시 등으로 시인의 28주기를 기리는 추모제가 삼산면 송정리 고정희 시인 묘소에서 진행되었고 시인의 생전 사진과 육필원고 및 유품도 전시해 시인의 치열하고 열정적이었던 삶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고정희문화제는 문화제 행사 기간에 ‘고정희 청소녀 문학 캠프’도 열어 젊은 여성 문화 작업자를 키우는 통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고정희 시인과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의 추모 기행으로 시작되었던 고정희문화제는 해를 거듭하면서 형식과 내용 면에서 큰 진화를 이루어 해남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고정희를 찾아오는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다. 또한 해남 여성운동의 싹을 틔운 ‘해남여성의소리’가 고정희 추모사업을 맡아 지역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어 지역의 여성주의 문화 확산에 기여하는 특색 있는 행사로 자리매김하였다. 고정희기념사업회가 개최하는 고정희청소년문학상과 고정희 청소녀 캠프가 시인의 정신을 이어 가고 있어 고정희문화제는 지역과 세대를 뛰어넘는 행사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광활한 들판, 그 들판에서 생산된 풍족한 쌀은 해남을 살찌웠다. 수려한 풍광은 많은 시인들로 하여금 해남을 노래하고 시대를 노래하게 하였다. 해남이 배출한 시인은 그 수를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멀리 조선시대로 거슬러 가면 최부를 시작으로 윤구, 임억령, 윤복, 유희춘, 백광훈, 윤선도, 윤이후, 윤두서, 초의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윤선도는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시인이었다. 한국 현대문학 100년의 역사에서도 해남처럼 많은 시인을 배출한 고장도 찾아보기 힘들다. 해남을 일컬어 ‘시문학의 1번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해남이 낳은 시인을 보면 이동주[현산면], 박성룡[화원면], 박진환[마산면], 법정·박문재[문내면], 박건한·김봉호[해남읍], 윤재걸[옥천면], 윤금초·김준태[화산면], 노향림·최일환[산이면], 황지우·오영빈[북평면], 김남주·고정희[삼산면], 백추자[송지면] 등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해남에서 많은 시인들이 나온 배경은 무엇일까? 해남의 문학 단체를 통해 살펴보자. 1950년대 해남에서는 두륜문학회가 결성되어 지역문학의 씨가 싹트기 시작했다. 1959년 9월 9일 지역문화와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민재식, 이정훈, 윤상현, 이광정, 김남용 등이 모여 두륜문학회를 결성하고 지역문화 활동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1972년 1월에 이르러서는 희곡작가 김봉호를 중심으로 한듬문학회를 창립하였다. 3년 후 한듬문학회는 한국문인협회 해남지부로 개편되었다. 1980년대에는 남촌문학회, 해남문학회 등이 결성되어 해남의 지역문학을 꽃피웠다. 해남에 많은 시인들이 배출된 것은 이러한 해남 지역 문학 단체의 결성과 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정희 시인은 43세의 짧은 생애 동안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상 실현을 꿈꾸는 희망찬 노래에서부터 민족민중문학에 대한 치열한 모색, 그리고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페미니즘문학의 선구자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적 탐구를 보이며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다 갔다. 시인은 비극적 오월의 봄에서 절망과 더불어 그 절망을 타고 넘을 열망을 뿜어 올리는 한(恨)과 그리움으로 “잘못된 역사의 회개와 치유와 화해에 이르는 씻김굿”을 통해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노래하였으며, 여성 민중의 삶과 수난을 노래한 「여성해방출사표」를 던지며 한국에서 페미니즘문학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립하고 「밥과 자본주의」를 통해 여성 민중시의 언어적 실천과 성취를 보여 주었다. 고정희는 자신의 문학적 삶에서 ‘세 개의 행운’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광주와 수유리, 그리고 ‘또 하나의 문화’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광주에서 시대 의식을 얻었고,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시절의 만남을 통하여 민중과 민족을 얻었고, 그 후 ‘또 하나의 문화’를 만나 민중에 대한 구체성, 페미니스트적 구체성을 얻게 되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고정희는 이 만남을 “분리가 아닌 상호 보완의 관계”로 바라보고 그 통일을 추구했던 시인이었다.

 

고정희는 1975년 박남수 시인에 의해 『현대시학』에 「부활 그 이후」, 「연가」 등이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고정희는 1984년에는 기독교신문사, 크리스챤아카데미 출판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86년부터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으로 일하면서 여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고정희가 여성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대안문화 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으로 참가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또 하나의 문화’는 기존의 문화를 남성중심주의 문화로 규정하고 남녀가 평등하고 건강한 벗으로 협력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며 대안적 문화운동을 표방한 단체이다. 사회학·인류학·여성학 등을 전공한 동인들과 더불어 새로운 대안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데 의기투합한 고정희는 여성 문화 무크지 『또 하나의 문화』를 창간하는 데 개국공신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모아 둔 여성문제 자료를 바탕으로 ‘여성사 새로 쓰기’ 작업을 구체화하는 것도 이 만남을 통해서 결실을 거둔 것들이다.

 

1988년에는 여성문제를 대중매체를 통해 공론화하는 데 이바지한 여성 정론지 『여성신문』의 주간을 맡아 신문 창간의 산파 역할을 해냈다. 고정희는 이때 여성 억압의 다양한 현장들과 부딪치며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시작에 전념하였다. 고정희는 날마다 시를 쓸 짬이 안 난다며 투덜대면서도 새벽 다섯 시만 되면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썼다고 한다. ‘오늘 하루를 생애 최초의 날처럼, 또한 마지막 날같이’를 생활 지침으로 삼고 가열차게 살았다. 고정희는 1984년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이 되면서 여성문제에 대한 시각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며 여성주의문학에 대한 탐구와 여성해방의 시를 창작하게 된다. 고정희는 「한국 여성문학의 흐름」이라는 글에서 그동안의 문학사가 남성 시각 중심으로 왜곡, 왜소화되어 온 여성문학에 대한 편견을 지적하고 시와 소설을 중심으로 고대문학과 1980년대 문학에 이르는 문학사를 여성 중심 시각으로 정리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여성문화란 현재 우리가 직면해 있는 지배문화 혹은 가부장제 부성 문화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대안문화’를 의미하며 이 문제는 비평적 과제와 창작적 과제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논지와 여성주의문학이 단지 성별 분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문화를 극복하고 참된 인간 해방 공동체를 추구하는 대안문화로서 ‘모성 문학’ 혹은 ‘양성 문학’의 세계관을 보여 주는 문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고정희의 시에서 여성문제가 본격적인 주제로 표출된 것은 『저 무덤 푸른 잔디』[1989]부터였지만, 『여성해방출사표』에 오면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이 좀 더 심화될 뿐 아니라 다양한 시적 방법론을 구사하게 된다. 고정희는 이 시집에서 남성중심주의적인 민중운동, 또는 인간 해방 운동이 여성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해방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주시하면서 “그동안 나는 사회변혁 운동과 페미니즘 사이에서 나름대로 심각한 갈등을 겪어 왔다. 예를 들면 민중의 억압 구조에는 민감하면서도 그 민중의 ‘핵심’인 여성 민중의 억압 구조는 보지 않으려 한다든지 한편 성 억압에는 첨예한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민중이란 말로 포괄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억압 구조에는 무관심한 듯한 현실이 그것이다.”라고 ‘여성’을 배제한 민중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여성해방출사표』에서는 ‘여성사 다시 쓰기’라는 기획에 따라 「이야기 여성사」와 「여성사 연구」라는 부제를 단 일련의 시들을 통해 여성 억압의 원인과 그 극복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여성해방출사표』를 던지면서 시작된 고정희의 여성해방운동과 글쓰기는 여성사에 관한 남다른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와 시의 새로운 결합을 꾀하고, 사람의 근본과 돌아갈 곳을 ‘어머니’의 모성으로 상징화함으로써 여성주의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고정희는 생전에 10권의 시집과 유고 시집 1권을 포함해 모두 11권의 시집을 남겼다. 43세라는 젊은 나이, 15년여라는 비교적 짧은 창작 기간을 감안할 때 이 같은 작품의 양은 고정희가 남달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시인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고정희는 자신과 주변 사람, 사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선명히 파악한 사람으로서 인생을 일관성 있게, 그리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우리가 소망하고 또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사람 중 하나이며 시와 삶이 거의 일치한 보기 드문 시인이었다. 고정희는 우리 시사에서 여성문제를 최초로 폭넓게 탐구한 여성주의 시인으로, 그리고 거대한 스케일과 왕성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역사에 대한 준열한 증언을 하였던 민중 시인으로, 또 기독교 정신과 생명에 대한 도덕적 순수함으로 처연한 서정성을 보여 준 서정 시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김남주와 고정희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한 활동은 2000년부터 ‘땅끝문학회’를 중심으로 추모행사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김남주기념사업회와 고정희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각각 문학제와 문화제 등을 개최하고 있다. 특히 2007년에는 해남군의 지원으로 ‘김남주 생가’를 복원하고 생가 주변에 작은 시 공원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김남주 시인의 삶과 시정신을 배우는 공간 콘텐츠 역할을 하고 있다. 매년 6월에는 고정희 생가에서 ‘고정희문화제’가, 11월에는 김남주 생가에서 ‘김남주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또한 김남주와 고정희의 시정신은 지역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계승되고 있으며, 고정희의 시정신은 여성주의 시민모임인 ‘해남여성의소리’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 작은 글들은 정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에 있는 화장실 벽에 걸려 있는 것들이다.

 

안쪽 집에는 시집과 책들이 놓여 있다.

 

고정희 생가는 그냥 평범한 시골 집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시가 나왔는지 궁금했다.

해남은 유독 시인 뿐만아니라 예술가들이 많이 나왔다.

고정희 생가 안쪽에는 지금도 누군가 살고 있다.

 

 

주소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길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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