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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해남군 가볼만한 곳 : 공재고택(공재 윤서두)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1.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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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3재로 일컬어지며,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다. 윤선도가 풍수지리상 명당터에 이 집을 지었으나, 바닷바람이 심해 다른 곳으로 옮기고 증손인 윤두서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지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현종 11년(1670)에 지어 후에 윤두서가 살게 되었고 순조 11년(1811)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지을 당시에는 문간채와 사랑채 등 48칸 규모였다고 하나, 지금은 안채와 곳간채·헛간·사당만이 남아있다.

ㄷ자형의 안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고, 북서쪽에 위치한 광의 남측지붕은 앞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우진각지붕이다. 바닷바람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으며, 벽은 방의 용도에 따라 회벽과 판자벽을 조성하였다.

문인화가의 옛집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수법이 잘 남아있는 유서깊은 전통주택이며, 인근마을에 해남 윤씨의 기와집 10세대가 있어 더욱 옛스러운 정취를 풍기고 있다.

 

해남 공재 고택(海南恭齋古宅)은 조선시대 최고 자화상을 그린 공재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가옥이다.

윤두서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조선 후기의 3재로 일컬어지는 선비화가로 고산 윤선도(尹善道) 증손이다. 1670년(현종 11) 건립되어 윤두서가 살았고 1811년(순조 11)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윤두서는 처음으로 백포리에 들어온 입향조로서 의미가 있다. 해남 공재 고택에는 현재 13칸 규모의 안채와 3칸의 곳간채, 그리고 사당만이 있다. 건립 당시에는 동쪽에 문간채가 있었고, 문간채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48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상량문에 따르면 사당은 1911년 건립되었고, 곳간채는 1925년 건축되었다. 해남 공재 고택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20세기 초기에 걸쳐 계속적인 가옥 확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보존이 잘 돼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32호이다.

 

주차장을 몰라서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입구까지 걸어갔다.

그래서 예쁜 담장은 덤이다.

 

해남 공재고택은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며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후기의 삼재로 일컬어지는 선비 화가 공재 윤서두(1668~1715)가 살던 집터이다. 처음 지을 때는 비교적 큰 규모를 자랑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문간채와 사랑채는 업서지고 안채 13칸과 곡간채와 헛간 그리고 사당만이 남아 있다.

안채는 "ㄷ"자형 평면으로 곡간채 사이에 출입통로가 나 있으며 한 가운데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방과 주방을 두어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본채에 남아 있는 상량문의 내용으로 보아 1811년 또는 1871년에 다시 지어진 건물로서 실제 건축 시기는 그 이전인 18세기로 보고 있다.

 

부엌문이 특이하게 생겼다.

 

뒷쪽 한켠에 집안 우물이 있다.

 

장독대다 가지런히 있다.

공재 고택은 현재 사람은 살지 않는다.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와 나무

 

마을 집인데 옛날 건축이 그대로이다.

 

윤서두 초상화

 

해남윤씨 집안이 해남 곳곳에 남아있다.

공재고택은 공재 윤서두의 생가이다.

조선 후기 3재의 한명인 윤서두 

조선 후기 3재 : 공재 윤서두,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주소 : 전남 해남군 현산면 백포길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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