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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해남군 가볼만한 곳 : 명량대첩비와 충무사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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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우수영마을에 있는 충무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4월 28일 탄신을 맞아 재례를 지내는

신성한 사당이다.

 

충무사는 해남 우수영마을에 성이 있는데 동문 근처에 있다.

위 사진이 충무사 주차장 앞 입구이다.

 

이 사진은 명량대첩비

 

해남 명량대첩비는 충무사 바로 왼쪽 바위 위에 세워진 비이다.

명량대첩비는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돌로 만든 비이다.

이 비는 직사각형의 받침 위에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구름과 용을 장식한 머릿돌을 얹은 형태어ㅣ다.

비문에는 선조 30년(1597) 이순신장군이 진도 벽파정에 진을 설치하고 우수영과 진도 사이 바다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함대를 무찌른 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다.

비문은 1686년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해서체로 글씨를 썼으며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통제사 충무 이공 명량대첩비 라고 비의 이름 12자를 썼다. 이를 2년 뒤인 1688년 3월에 전라우도수군 절도사 박신주가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그후 1942년 일제의 민족학살정책으로 강제 철거되어 서울 경복궁 근정전 근처에 버려졌으나 1950년 우수영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문내면 학동리 1186-7번지로 비를 옮겨 세웠다.

이후 국도 18호선의 확장과 고가도로 신설 때문에 주변 경관이 나빠져 2011년 3월 처음 설립지인 지금의 위치로 비를 옮겨 관리하고 있다.

* 충무공행록은 12척으로, 선조실록과 사대문궤는 13척으로 기록하여 전해진다.

 

충무사 제일 안쪽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정이 있다.

 

명량대첩비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우여곡절 끝에 원래 있던 이곳에 세워졌다

대한민국 보물 제503호이다.

해남의 명량대첩비는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돌로 만든 비이다. 이비는 직사각형의 받침 위에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구름과 용을 장식한 머릿돌을 얹은 형태이다. 비문에는선조 30년(1597) 이순신장군이 진도 벽파정에 진을 설치하고 우수영과 진도 사이 바다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함대를 무찌른 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다.

비문은 1686년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해서체로 글씨를 썼으며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통제사 충무 이공 명량대첩비" 라고 비의 이름 12자를 썼다. 이를 2년 뒤인 1688년 3월에 전라우도수군 절도사 박신주가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그우 1942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강제철거되어 서울 경복궁 근정전 근처에 버려졌으나 1950년 우수영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문내면 학동리 1186-7로 비를 옮겨 세웠다. 이후 국도 18호선의 확장과 고가도로 신설때문에 주변 경관이 나빠져 2011년 3월 처음 설립지인 지금의 위치로 비를 옮겨 관리하고 있다.

충무사를 한눈에 볼수 있게 찍었다.

 

 

일제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약 35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도 우리의 언어에는 일본어가 많이 남아있고 잔재 또한 많이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역사왜곡과 영토침탈.. 독도는 왜 탐내는지..

대마도도 신라시대에는 우리가 지배를 했는데.. 대마도를 주라고 하자.

 

아키히토 당시 천황은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일본천황은 백제의 후손이다.

 

 

주소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9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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