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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강진군 가볼만한 곳 : 고려청자박물관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2.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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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에 1997년 9월에 개관한 고려청자박물관이 있습니다다.

이곳에는 약 3만종의 고려청자가 수집되어 진시되고 있습니다.

 

고려청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푸른빛의 자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고려시대에는 청자를 사기, 청자, 녹자, 청도기, 청사(기)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렀으며 차츰 청자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릇의 표면에 입혀진 유약의 푸른빛에 따라 청자라고고 이름이 붙여졌지만 실제로 청자의 색은 제작기술의 발전 정도나 품질,  청자를 생산한 지역의 흙성분, 번조온도, 특히 가마 안의 산화, 환원의 번조 분위기에 따라 담청색, 담녹색, 회녹색, 청회색, 녹황색, 녹회색, 녹갈색, 담황색 등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가장 잘 만들어진 청자의 푸른색은 비취옥의 생과 비슷하여 "비색"이라고 불렀으며 처음으로 청자를 만들었던 중국인들도 천하제일이라고 칭송할 정도였습니다.

고려청자는 우리 선조들의 높은 과학기술과 문화적 역량, 예술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고려청자는 고려시대 9~10세기 경 중국 절강성의 자기 제작기술에 영향을 받아 최초로 제작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차를 마시기 위한 청자 해무리굽 완이 가장 많이 제작되었다.

12세기부터 고려의 자기 제작 기술은 급속히 발전하였고 특히 초벌구이를 통한 청자의 제작은 고려인들 스스로 청자의 색을 "비색"이라 칭할 만큼 고려청자의 빛깔이 아름다워졌습니다. 고려 중기에는 일상생활 용기를 비롯하여 향로, 제기, 기와, 타일 등 여러가지 형태의 청자를 만들어졌으며 음각, 양각, 압출양각, 상감, 철백화, 동화, 철채상감, 투각, 화금청자 등 다양한 종류의 장식기법이 완성되었다. 또한 동물이나 식물의 모습을 본 따 만든 상형청자도 만들어져 화려한 고려청자 제작의 절정기를 맞이합니다.

 

고려 후기에는 자기 제작 여건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대부분 문양이 없는 청자가 생산되었으며 태토나 유약의 품질이 떨어지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부 제작된 상감청자 역시도 반복적인 문양만 장식되는 등 제작방법이 간단하게 바뀌어 갔고 조선 초 분청사기의 제작으로 그 전통이 이어졌습니다.

 

고려청자의 요지는 한반도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고려 초기, 중기, 후기에 따라 청자요지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이 달라집니다.

 

고려 초기의 청자 요지는 경기도, 황해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중서부지방과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남서부지방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고려 초기 중서부지방을 중심으로 한 고려청자 요지는 중국의 가마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벽돌로 가마를 만든 벽돌가마에서 청자를 생산되었으며 남서부지방에서는 토기가마의 전통을 이어받아 진흙을 뭉쳐 만든 진흙가마에서 청자를 만들었습니다.

 

고려중기가 되면 벽돌가마는 사라지고 남서부지방에서 유행했던 진흙가마로 청자를 제작하데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강진과 부안지역으로 집중되어 청자의 생산이 이루어지다가 점처 대전, 음성, 용인, 여주, 칠곡, 부산, 해남 등으로 청자의 제작지가 확산되었습니다. 강진 사당리를 중심으로 고급 청자가 생산되었고 그 외 지역에서는 강진 사당리 청자와 돌일한 장식기법과 문양이 장식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품질이 떨어지는 청자가 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강진에서 개경으로 청자를 운반했던 모형이다.

2007년 5월 충남 태안 대섬 인근 해저에서 발굴된 청자운반선의 구조를 1/4로 축소하여 추정, 제작되었다. 이 발굴조사를 통해 탐진이라는 강진의 옛 지명이 적인 목간이 발견됨으로써 강진 청자가마터가 고려 왕실인 개경(개성)에 청자를 납품했던 관요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증시켜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박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을 이동하기에 적합하도록 선체 바닥이 편평한 구조이다. 발굴된 유물로는 2만3천여 점의 청자와 선원들의 선상행활을 알려주는 도기, 철제솥, 청동그릇, 밧줄 등이 있다. 청자꾸러미 사이를 나무막대롤 고정시키고 완충제로 짚을 넣었는데 그 동안 갯벌속에 묻혀 있었기에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고려청자는 빼어난 솜씨와 아름다움의 조화를 대표합니다.

고려청자는 고려시대 공예품을 대표하는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청자를 생산한 고려는 곧 완숙한 기량과 고유의 미감을 토대로 천하제일의 청자를 완성하였습니다. 기능적이며 아름다운 생김에 연꽃, 국화, 구름, 학, 그리고 연못가의 풍경에 이르기까지 생활 속 친근한 소재들과 장면을 담아 그릇을 장식하고 그 위에 맑고 푸른 빛깔 유약을 입힌 고려청자는 지난날 이 땅 사람들의 심성과 그들을 둘러싼 자연의 정경을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맑은 하늘빛을 머금은 비색 청자와 화려한 장식미의 극치를 구현한 상감청자, 각종 동식물의 형상을 본뜻 재치넘치는 상형청자 등은 선조들의 높은 문화수준과 예술적 전통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9~10세기 경 중국 절강성 월주요의 청자 제작기술을 도입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도기 제작단계에서 자기 제작단계로 요업 기술이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주로 차를 마시는 용도의 완(해무리굽완)이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고 이외에 발, 접시, 반구병, 장고 들을 만들었다. 대부분 문양이 없으며 음각기법의 연꽃잎 무늬가 소량 확인된다.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용하던 도기는 주로 저장용과 운반용으로 사용되고 청자는 금은기를 대체하는 일상용, 의례용으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

 

고려중기의 청자요지는 진흙가마로 나타나며 강진 사당리, 부안 유천리, 서울 수유동, 예천 황지리 등으로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강진지역에서는 고려 후기의 요지가 이전보다 증가하며 서울 수유동, 예천 황지리 등에서는 강진 사당리 10호와 같은 고려 최말기의 상감청자가 생산되었고 조선 초 분청사기로 계승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곳입니다.

 

발굴됐지만 완성품이 아닌 깨진것 들도 많이 출토되었다.

 

강진 청자가마터는 현재까지 대구면과 칠량면에서 약 200여 개소가 확인될 정도로 많고 가마터별로 수습된 지표조사 출토품을 통해 고려시대 초기부터 후기까지 고려청자의 발달과정을 한 눈에 살펴볼수 있다.

무늬가 없고 녹갈색을 띠던 초기청자가 점차 제작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유약이 좋아지고 다양한 형태와 기법이 등장하며 고려후기가 되면 점차 무늬가 단순, 간략화되다가 조선시대 초에 분청사기로 변모하게 된다.

고려시대 초기의 가마터는 용운리 63호, 9호, 36호가 대표적이며 

절정기에 해당하는 고려시대 중기는 사당리 7호, 8호, 23호 27호가 해당되고 

고려시대 후기는 사당리 10호, 13호가 그 특징을 잘 보여준다.

 

14세기말 이후 고려청자는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진 분청사기로 그 전통이 계승되었고 조선시대 17세기까지 만들어진 백자 태토에 청자유약을 입힌 청자로 변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는 백자라고 하는 세계적인 도자산업의 큰 흐름 속에서 청자는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단절되다시피 명맥만을 유지하였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부터 이왕직미술품제작소의 도자부와 공업전습고의 도기과 일본인이 운영하는 도자공장 등에 의해 고려청자의 본격적인 재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근대기에는 일본인들의 자본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일본인의 기호에 맞춘 고려청자로 제작되어 우리의 전통이 사라져갔습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강진군 일대에서는 청자 요지에 대한 재표조사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강진 지역민을 중심으로 청자요지의 중요성과 학술적 가치는 물론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고 고려청자의 재현에ㅓ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1977년 본격적인 고려청자의 재현을 위해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1978년 2월 화목가마에서 만들어진 첫번째 재현청자가 완성됨에 따라 강진에서의 고려청자 재현에 첫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이후 시설확충과 함께 수 십차례에 걸친 시험번조를 통해 청자재현과정에 잘못된 부분을 수정, 보완하였으며 1981년 11월 시험번조결과를 일반인에게 공개하였고  1982년 광주 남도예술회관에서 재현품 전시를 통해 높은 재현 수준을 인정받았습니ㅏㄷ.

 

강진군은 본격적인 고려청자 재현사업의 활성화를 위해 1986년 '고려청자사업소'를 개소하고 소규모의 전시관과 함께 발굴 조사된 사당리 41호의 보존을 위해 보호각을 설치하였습니다, 고려청자사업소는 고려청자 재현을 위한 시설의 확장과 적극적인 재현기술을 축적한 결과, 고려 중기 생산되었던 빙열이 없는 유약과 강도를 높이는 번조법을 자체 개발하였습니다. 

또한 2000년대부터 청자재현사업의 규모 증가와 활성화를 위해 강진군에서 연구개발비와 각종 보조금을 아끼지 않은 결과 개인요가 활발히 운영되어 청자 재현사업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며 단국대학교, 요업기술원, 강진군을 주축으로 청자의 세계화 및 명품화를 위한 공동연구기반구축 사업을 통해 강진 청자의 밑거름을 마련하였습니다.

 

청자를 제작을 주문한 사람의 이름이 함께 청자운반선에 있었다.

 

고려청자박물관 바로 오른쪽에는 사당리 41호 청자가마터를 관리 보호하고 있었다.

이 청자가마터는 1968년 발견되어 1973~1977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한 사당리 41호 가마이다. 가마의 천정과 굴뚝이 파괴되었지만 여러 겹의 벽면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에 가마 사용방법에 대해 할 수 있는 유규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가마의 길이는 약 8.0m, 폭은 1.1~1.5이며 20도의 자연 경사면을 이용한 반지하식 오름가마구조이다. 현재 남아 있는 벽면이 여러겹으로 중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마를 다섯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마구조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아궁이 앞에 작은 구덩이를 파놓은 것이다. 발굴 당시 음각, 양각, 상형청자와 상감청자 등의 청자가 출토되어 청자의 절정기인 12세기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설사의 말씀에 의하면 박물관이 있는 곳이 가마터라고 한다. 

왕실청자를 만들었던 곳이 바로 이곳 박물관이 있는 사당리이다. 다른 곳에서도 고려청자를 만든 곳이 여러곳이 있다. 

하지만 이곳 강진에서 왕실청자를 만들어 납품했다니 대단하다.

자기가 만들어질려면 흙과 불의 온도가 중요하다.

가마의 온도가 1000도 이상이 되어야만 도자기가 된다. 

 

 

주소 : 전남 강진군 대구면 청자촌길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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