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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남 보성군 가볼만한 곳 : 벌교 금융조합 (드론 영상)

by 리차드박(Richard Park)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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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중에서 제일 알려진 곳이 벌교이다. 

호남지역에서 엣말에 벌교가서 주먹자랑 하지 말고 여수가서 돈자랑 하지 말고 순천가서 인물자랑 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벌교에서 이런 말이 나온 연유는 일제 강점기때 의병이 다리에서 말을 타고 있는 일본순사를 맨 주먹으로 때려 죽여버려서 생겼다고 한다. 

또 벌교를 지나서 남쪽으로 고흥, 동쪽으로 순천, 서쪽으로 보성읍내 등 교통 요충지여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다보니 주먹을 쓸 일이 많았으리라~~

 

이런 벌교읍에는 국가등록문화재 제226호인 벌교금융조합이 있다.

벌교금융조합은 붉은 벽들을 바탕으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돌을 깍아 넣어 건물의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이 광공서형 건물로 즐려 지었던 그 모습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지난 역사를 반추해주고 있다. 그 위치 또한 번화가의 첫머리인 삼거리에 자리 잡아 고객들의 편리를 최대로 도모한 세심함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는 금융조함장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해온 이력을 지닌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가 척결되지 못한 이 땅의 비극이 수없이 많은 분야헤서 그런 식으로 기득권을 행사했음을 작가는 여러 주인공을 통해 일깨우고 있다. 

"금융조합이라는 것이 결국은 돈 장사이고 보면 그의 이재 솜씨는 멋 부리는 것보다 한 수가 더 앞질러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송기묵은 돈을 다루는 사람답게 치부에도 능해 은밀하게 고리대금업까지 해가며 탄탄한 재력을 확보해 딸을 서울의 이화여대까지 유학시키지만 결국 좌익들에게 죽고 만다.

 

 

 

벌교금융조합은 일본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반영된 근대 건축물로 2005년 12월 9일 등록눈화재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1918년 "벌교금융조합"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26년 "농촌지도소 벌교지소", 벌교지역 "농민상담소"등으로 활용되었다. 현재 내부는 벌교금융조합의 역사와 한국 화폐사에 대한 전시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시대 화례이야기 (996~ ) 한국 최초의 화폐 고려시대 고려전

건원중보(996) : 고려 성종(981~997) 때인 996년에 발행되었다.

동국중보(996) : 당 화폐를 모방한 건원중보배동국전은 앞면만 보면 중국의 화례와 구별이 어려워 뒷면에 "동국"을 앞으로

   내어 "동국중보"를 새겨 만든 것이 우리나라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화례가 되었다. 

동국통보(996) : 1910년에 개성 부근의 고려묘에서 출토되어 그 실물이 처음 확인되었으며 이후 안동 서삼동 벽화고분

    중원 누암리 고려묘 등에서 중국전과 같이 출토되었다.

해동원보(996) : 1910년대 초경 개성부근 고려묘에서 출토되었다. 원보라는 용어가 중국화폐에 흔히 쓰이는 전명으로

   통보아 중보보다 선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해동중보(996) :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철전의 하나로 모양은 둥근 바탕 중앙에 정사각형의 구명이 하나 뚫려 있고

   글자의 위치는 회독이며 해서체로 앞면에는 상하 좌수에 "해동중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글자나

   부호가 없다. 

해동통보(996) : 제작연대가 확실하며 본격적으로 유통된 최초의 동전으로 숙종 7년(1102)에 제정된 고주법에 의해

   주전도감에서 주조되었다. 

삼한통보(996) : 문헌기록에 따르면 숙종 7년(1102) 해동통보가 주조된 이후 주전도감에서 제작되었고 충주 고암동

   고려묘에서 출토되었다.

삼한중보(996) : 삼한통보보다 조금 늦게 사용된 동전으로 문헌기록에 의하면 숙종 8년 (1103)에 주조되었다.

   그 실물은 충주 호암동 고려묘에서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조선통보는 세종 5년(1423)부터 인조대에 주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해서 조선통보와 팔분서 조선통보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모두가 소형전이다. 대형전으로는 배면에 "호일전"이라 새겨진 것과 무배자인 해서전과 배면에 "십"자가 새겨진 팔분서전이 있는데 이들은 시주화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조선통보 시주화에 고종 18년(1881)에 소형전이 있는바 이것이 상평통보의 모전과 유사하다

조선통보 해서체(1423)는 세종 5년에 주조된 조선 최초의 동전이다. 중국 동전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을 만큼 매우 정교하고 우수하다.

조선통보 팔분서체(1625)는 1429년에 이르면서 조선통보의 가치가 더욱 하락하여 불신을 받게 되었다. 조선통보는 1445년(세종27) 이후 저화의 재발행으로 인해 자취를 감추었다가 1633년(인조 11). 팔분서체로 다시 주조되었다.

조선통보 십전통보(1651)은 효종 2년(1651) 7월 우의정 한홍일의 건의에 따라 민간에서의 사주전이 허락되었으며 동년 11월에 화폐의 유통을 적극 장려할 목적으로 "행전사목"을 제정 실시하였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백성들이 동전 50분씩 지니고 다닐 것을 의무화했다. 이상의 사주전 허락은 50문씩 동전을 지니고 다녀야 되는 의무 수행에 따른 불편을 덜기 위하여 십전통보를 주조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무배자전(1633), 단자전(1678), 당이전(1679), 중형전(1752), 당일전(1778), 당백전(1866), 당오전(1883) 등이 발행되었다. 

 

 

상평통보 압인화

상평통보 종류로는 속 테두리가 원형인것과 사각형인것의 2종류가 있다. 연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고 기록이 부실하여 정확한 발행시기를 확인할 수 없으나 고종 21년(1883)과 개국 499년(1890) 이라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 대동전

대동은전은 고종 19년(1892)에 주조된 상평통보와 같이 유통되었는데 귀금속으로 취급되어 부자의 손에 들어가 퇴장하거나 해외에 흘러 나가 곧 유톨량이 감소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당시 대동은전의 원료로 사용하던 은의 가격이 올라 원가가 비싸지는데다 원료의 구입마저 어렵게 되어 다음해 6월에는 주조가 정지되었다.

조선시대 을유시주화

고종 20년(1883) 화급한 국가의 재정 궁핍을 해결하기 위하여 전환국을 설치하고 상평통보 당오전의 주조 발행을 시작하였다. 근대주화의 제조를 위한 설계서가 고종황제에게 제출되었으나 시기 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고종의 의지로 고종 21년(1884) 3월에 근대 화폐의 제조가 적극적으로 발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화폐 조선시대 시주화

고종 20년 (1883) 7월 조선 정부는 당시 사무 협판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1848~1901)의 건의를 수용하여 상설 화폐 제조기관인 전환국을 설치하였다. 설립 초기 전환국은 주로 당오전 발행의 업무를 관장하였고  1884년 묄렌도르프가 전환국 총판에 임명되면서 신식 화폐 주조 업무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화취장 쌍용주화는 주화 앞면 윗 부분에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을 넣어서 붙은 이름이다. 당시 일본 오사카 동 제련소 사장이 한국의 조폐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조선 정부와 설득 작업을 벌려 마침내 조선의 화폐 개혁에 대하여 합의를 얻어내었고 이로 인해 1892년 11월 인천전환국이 설립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 호조태환권

일본의 1원 은화는 일본 상인이 우리나라 진출에 따라 은화의 유입량이 현저하게 늘어나 개항지에서 유통되었다. 고종 31년(1894) 청일전쟁이 발발한 후 우리나라를 거쳐가는 일본군이 화폐문제로 고통을 겪게되자 강제로 1원 은화의 통용을 실시하였다.

광부 원년(1897) 8월 일본 다이이찌 은행은 조선국 화폐사를 일본 은행에 제출하여 일본 1원 은화에 일정한 각인을 찍어 우리나라 무역시장에서의 유통을 건의하였던 바 일본 은행이 대장성의 양해를 얻어 허가했다.

고종 29년(1892) 힌천전환국의 설치와 함께 지폐를 발행하여 새로 제조될 신화폐, 은화 또는 동화와 구폐화 엽전(상평통보)과의 교환. 정리, 업무를 맡아볼 태환서가 서울에 설치되었다. 여기서 50냥, 20냥, 10냥, 5냥 등 4종의 호조통화태화권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태환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로 근대식 인쇄기술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태환지폐를 구화와 교환 발행함으로써 당시 혼란한 화폐제를 정비한 다음 신화의 제조량이 증가되면 다시 신화와 교환할 계획이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소각되었다.

 

대한제국시대의 화폐이야기

국내에서 발행된 최오의 은행권 제일은행권

국내에서 발행된 최초의 은행권은 불행하게도 우리 것이 아닌 일본의 제일은행이었다. 일본 제일은행이 1902년 금융계를 장학할 목적으로 무단으로 발행해 강제 유통시킨 1엔구너과 5엔권, 10엔권 3종의 지폐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권인 것이다. 당시의 은행권 앞면에는 일본 제일은행 총재의 초상이 실려 있다.

 

 

최초의 조선은행권인 100원권에는 일본은행 구 100원권에 있던 대흑천상이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대흑천상은 본래 불교에서 삼보,(불, 법, 승)를 수호하고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해준다. 복의 신으로 여겨지면서 부엌에 모시게 되었다. 이듬해 1월부터 발행된 조선은행권에는 공통적으로 수노인상이 들어가게 되어 나름대로의 차별성을 꾀했다. 수노인은 중국 송나라 대부터 유래된 동양 전통 칠복산의 하나로 백발에 지팡이와 부채를 갖고 사슴을 끌고 다니며 만물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신선을 말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십원, 오십원 속 이야기 

10원에 있는 다보탑은 국보 제20호로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이다. 535년 법흥왕때 짓기 시작하여 751년 경덕황때 완성된 아주 뛰어난 석조물로 네 기둥의 가운데에 네 마리의 석사자가 있었으나 일제 시대에 없어지고 현재는 하나만 남아있다. 10원 동전의 앞면에도 이 돌사자가 그려져 있다. 

 

1972년부터 만들어진 오십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오십원과 비슷한 동전 형태이다. 1770년 백원 동전이 발행되기 시작하면서 백원 이하의 지폐 발행이 1973년부터 중단되었다. 그래서 오십원 역시 동전 형태로 발행되기 시작햇다. 이렇게 발행되기 시작한 100원 이하의 동전들은 1990년대까지 그 증가 추세가 엄청나게 연평균 20.5% 발행 증가율을 기록했다.

오십원에 그려져 있는 벼 이삭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한국 전쟁 이후 가난했던 보릿고개 시적을 극복하고 잘 먹고 잘 살자는 의미를 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국의 동식물을 그려서 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의도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국제식량농업기구가 10월 16일  세계 식량의 날 을 기념하는 동전 제작을 권장함게 따라 벼이삭을 오십원에 넣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식인 쌀을 주제로 벼이삭과 잎사귀를 새겨 넣자 국제식량농업기구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백원, 오백원 속 이야기

백원에 그려진 성스러운 영웅 성웅 이순신

성웅으로 불리기까지 이순신 장군은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돌파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람ㄷ르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45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형동)에서 태어났다. 이순신 장군은 장원급제를 한 이후부터 원칙을 준수하는 특유의 강직함으로 이름을 알렸다 장원 시험을 보다가 말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는데 다시 일어나 나무껍질을 벗겨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그의 우직함을 보여주는 좋은 일화 중 하나이다.

이순신 장군의 진가는 1592년 임진왜란, 그 중 목포해전에서 빛나기 시작햇다. 이후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전투인 사천해전, 학익진 전법으로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오백원에 그려져 있는 새는 두루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두루미를 학으로도 부른다. 두루미는 우리나라에서는 겨울철에 자주 볼 수 있고 날개를 폈을때 그 크기가 2m가 넘는 큰 새이다. 울음소리가 두루루룩 처럼 들려 두루미 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두루미는 긍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했다. 두루미가 오백원에 그려진 이유는 두루미의 무궁한 발전과 경제 도약을 기원하는 의미이다. 

1998년  IMF 외환 위기때 오백원은 딱 8천개만 발행되었다. 게다가 전량이 민트세트로 제작되어서 외국 귀반 접대용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발행된 오백원 중 많은 양이 외국으로 반출되기도 해서 동전 수집가들 사이에서 1998년 오백원의 가치는 오백원 그 이상이다. 

오백원은 1982년 발행 첫해부터 1984년까지 활발하게 발행되다가 1985~6년 잠시 중단되었다. 그리고 발행이 재개된 1987년에는 단 1백만개만 발행되어 1987년 오백원은 1998년 오백원처럼 희소성이 있다.

 

 

천원속에는 매화 그림이 있다. 사군자중의 하나이며 퇴계 이황이 생전에 가장 아꼇던 나무이다.

명륜당은 생원, 진사 시험에 합격한 유행이 공부하던 성균관내 건물이다. 퇴계이황은 수차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했고 보물 제141호이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조선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교육자, 화가, 성리학자이다. 선비로서 수기하고 사대부가 되어 치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수기치인의 자세를 평생 수행하며 살았다. 

 

계상정거도 : 퇴계 이황 생존시의 건물인 서당을 중심으로 주변 산수를 담은 조선시대의 풍경화이다. 겸재 정선의 작품이다. 보물 제585호로 지정된 퇴우이선생진적에 실려 있다.

 

오천원속 이야기

오죽헌 몽룡실 :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의 "몽룡실'은 한국의 주택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다. 이 방이 "몽룡실"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던 날 검은 용이 이 방으로 날아와 마루에 서려있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원도 강릉시 축헌동에 있는 오죽헌 몽룡실은 현재 보문 제1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율곡 이이(1536~1584)는 아홉 번의 장원 급제, 10만 양병설, 주기론, 기호학파, 오죽헌, 신사임당의 아들 등 설명하는 수식어가 많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생푸 1년도 안돼 말과 글을 깨우쳐 주변을 놀라게 했다. 3세 때 이미 글을 깨우치고 어머니 신사임당의 글과 그림을 따라할 정도로 비범했다. 이후 아홉 번의 장원급제를 하고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비판하며 주기론을 만들기도 한 조선시대 대표 천재 유학자이다.

 

전 사임당 초충도 : 8폭병풍 중 "수박과 여치", "맨드라미와 개구리" 그림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호다. 오죽헌 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만원 속 이야기

용비어천가 : 용비어천가 제2장에 있으며 조선시대 시가이다. 최초의 한글작품이다. 

일월오봉도 : 조선시대 임금의 상징물이며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한쪽에는 해, 한쪽에는 달이 그려져 있는 그림은 바로 일월오봉도다. 일월오봉도는 다섯개의 산 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물이 일정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이 그림은 항상 왕의 뒤에 있고 줄을때도 같이 묻힌다. 병풍만 있을 때에는 완성된 그림이 아니고 왕이 앉아 있어야만 비로소 그림이 완성된다. 

 

혼천의 : 천체 관측기구이며 송이영이 제작한 혼천시계(국보 제230호)의 일부이다.

백성들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던 조선시대,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기후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자연을 예즉하고 농사에 피해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심혈을 기울려서 장영실, 박연, 정초 등의 과학자들과 함께 혼천의를 만들었다. 이렇거ㅔ 만들어진 혼천의는 해와 달, 오행성의 위치를 즉정하는데 사용되었다. 혼천의는 수동으로 작동하지 ㅇ낳아도 측정이 되는 아주 정밀한 기기였다고 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 : 조선시대 천문도, 국보 제228호,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태조 4년인 1395년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1985년에 과학 문화재로서 처음으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만원권에는 28수의 별자리를 식별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과학천체망원경 : 직경 1.8m인 우리나라 최대 반사망원경, 보현산천문대 소재

혼천의의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망원경은 우리나라 현대 과학을 상징하는 보현산 천문대의 망원경이다.

 

세종대왕(1397~1450) 조선시대 제4대왕이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위인이다. 그 이유는 문자, 역사, 지리, 정치, 경제, 농사, 의약, 음악, 종교 등 일상 생활에서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기술과 지식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오만원 속 이야기

묵포도도 : 신사임당의 작품이며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오만원권의 앞에 그려져 있는 묵포도도는 풍요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신사임당은 일곱 살 때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리면서 실력을 쌓았는데 이때부터 산수화와 포도, 물, 벌레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충도수병 : 신사임당의 작품, 8폭 병풍중 일곱번째 가지그림

신사임당이 얼마나 그림을 잘 그렸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화로 가장 유명한 것이 닭이 실제 곤충인 줄 알고 신사임당의 그림을 쪼았다는 이야기이다. 신사임당이 풀벌레 그림을 생동하는 듯이 섬세하게 그리고 난 후 볕에 말리기 위해 그림을 마당에 내놓자 닭이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대서 종이가 뚫어질뻔했다.

 

월매도 : 신사임당은 사군자를 사랑했다. 오만원구너의 뒷면에도 월매도라는 매화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월매도는 신사임당이 직접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신사임당이 살았던 조선 중기 당시에 그려진 매화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뻬어난 작품이다. 이 그림은 매화 나뭇가지의 곧음, 강건함을 달밤의 모습으로 그렸다. 

 

풍죽도 : 이정(1541~1622)의 작품이다.

사군자는 유교 문화권에서 군자로 비교되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네가지 식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봄은 매화, 여름은 난초, 가을은 국화, 마지막으로 겨울에는 대나무가 상징한다.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르고 곧게 자란 성질이 있기 대문에 군자의 지조와 절개를 뜻한다. 대쪽같은 사람이다 라는 말이 불의나 부정과는 타협하지 않는 본인의 지조를 지켜나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오만원권에 그려진 풍죽도는 이정의 작품인데 이정은 목죽화에 있어서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힐 정도로 실력 있는 화가이다. 오만원권의 풍죽도는 대나무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묘사하였는데 짙은 먹과 흐린 먹을 대조시켜 탁월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신사임당 : 문인, 서화가, 

우리에게 율곡이이의 어머니로도 친근한 신사임당(1504~1551)은 평벙한 현모양처 이상으로 시, 십자수, 옷감 제작, 성리학 등에 능한 여류 예술가다. 신사임당은 아들 딸에 차별을 두지 않고 교육관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어렸을때 부터 천자문, 명심보감, 사서육경 등을 배웠다. 여러 딸들 중에 기억력이 뛰어나서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서 받았다.

아버지는 신사임당의 재능을 키워 줄 사윗감으로 이원수라는 사람을 점찍었고 훗날 신사임당은 이원수 사이에 5남 3년을 두게 된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분위기 특성 상 여성이 예술 활동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지만 아버지와 남편 이원수의 지지를 받아 신사임당은 꾸준히 시를 쓰고 서예르 ㄹ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특히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긴 사친이라는 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시이다.

 

 

 

일본식 건물로 지어진 벌교금융조합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서 문화재로 등록이 되었다. 

내부에는 우리나라의 화폐 변천사와 외국의 화폐까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태백산맥의 무대였던 벌교에는 여러 건물들이 아직도 있어서 교육적 효과를 볼 수 있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유튜브 검색 "리차드박"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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