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에 1957년 6월 12일에 기념탑을 건립했는데 1973년 옥포조선소가 기공됨에 따라 기념탑과 옥포정을 아주동 탑곡마을에 이건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위상에 비해 그규모가 협소하여 위치적으로도 적합하지 않아 이곳 부지를 확보하여 1996.6.22 준공ㆍ조성하였다.
넓이는 10만 9398㎡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옥포만에서 왜선 50여 척 중 26척을 격침시킨 옥포대첩을 기념하여 조성하였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첫 승첩으로 이후의 전황을 유리하게 전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 6월 12일에 기념탑을 세웠으며, 1963년에는 옥포정을 완공하였다. 1973년에 옥포조선소가 들어서며 기념탑과 옥포정을 아주동 탑곡마을로 이건하였다. 그러나 주변이 협소하여 1991년 12월부터 현 위치에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높이 30m의 기념탑과 참배단·옥포루·팔각정·전시관 등을 건립하여 1996년 6월에 개원하였다. 이중 '충(忠)' 자를 형상화한 참배단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있다. 전시관은 옥포해전 당시의 해전도 등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며, 옥포루는 전망대를 겸하고 있는 팔각 정자이다. 공원에서는 매년 이순신 장군의 제례행사가 열리며, 6월 16일을 전후하여 약 3일간 옥포대첩기념제전이 열린다. 개원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는 5시)까지이며 어른은 1000원, 어린이는 4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인근에 옥포랜드와 덕포해수욕장·대금산 등의 관광지와 장목진객사·구영등성·구율포성·이수도패총 등의 유적지가 있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부터 1598년 11월 19일까지 약 7년간의 전쟁으로 1차 침입과 2차 침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592년 4월13일 임진년에 발발한 침입을 제1차 침입, 3년 간의 강화 교섭기를 거쳐 1597년 침입을 제2차 침입이라 하며, 이 둘을 합해서 우리는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옥포대첩기념공원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께서 옥포 앞바다에서 치룬 첫 번째 해전으로 첫 승전보를 올렸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조성했다. 처음에는 이순신장군의 우국충정과 충무정신을 후세에 계승코자 1953년 아주동 당등산인 거북재에 기념탑을 건립하고 1963년 옥포정을 낙성해 해마다 기념행사를 거행하였으나 1973년 대우조선소가 들어서면서 당등산 부지가 조선소로 편입되었고 기념탑과 옥포정을 조선소 구역 내인 아주동 탑곡마을에 이전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첫 승첩지로서 역사적 위상에 비하여 그 규모가 협소하고 위치적으로 적합하지 않아 거제도민의 여망에 따라 현재의 부지에 1996년에 건립하였으며 총 면적은 109.022㎡이다. 매년 6월 16일 전후 약3일간 옥포대첩 기념 제전 행사를 하고 있으며 시설물로는 기념관, 효충사, 옥포루, 기념탑, 참배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배단은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충'자로 형상화 하였고, 옥포루는 팔작누각형 한식건물로, 기념관에는 해전도 등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탑은 높이 30m로 학익진, 전선, 태산모양을 형상화하여 조선수군의 진취적 기상을 표현하였다.
100년간의 전국시대 내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진출을 위해 쓰시마 도주에게 조선 정벌을 준비하라고 명령을 내린 시기는 1587년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를 이용해 게이텐스 겐소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명을 정복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내어 달라(가도입명)"라는 주장을 전달하였으나 조선은 명을 부모님의 나라로 섬기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길을 내어 줄 수가 없어서 거절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차 대마도 도주를 이용하여 교섭을 청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조선을 침략할 뜻을 전달하였다. 본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는 지방군주(다이묘)들의 반란을 막고, 조선을 지나 명나라를 넘어 동남아까지 점령하는 대륙진출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1590년 3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종사관 허 성 등 통신사를 파견 일본의 정세를 알아오게 하였다. 1591년 3월 귀국한 통신사가 조정에 보고할 때 서인 이었던 황윤길은 "왜의 침입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했으나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왜의 침입이 없을 것"이라는 상반 된 보고를 함으로써 조정의 의견은 통일되지 못했고 전쟁에 대한 대비 또한 소홀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1592년 4월 13일 일본을 출발한 왜군은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4월 16일 동래성까지 함락하게 되었다. 4월 18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이 부산에 상륙,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이 다대포에 상륙해서 20만 대군의 왜군은 좌로, 중로, 우로 등 3개의 경로(조령, 추풍령, 죽령)로 나뉘어 조선의 도읍지인 한성으로 북상하게 되었다. 그러자 선조는 한성을 버리고, 개성을 향하여 피난길에 오르고, 20여일 만에 한성이 함락(5월 3일)되자 다시 평양으로 피난을 떠났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자 백성들은 궁궐을 불태우고, 약탈을 일삼으니, 나라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한성이 함락되고, 함경도까지 왜군들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남해안 일대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들이 왜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1년 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있었고, 원균은 경상 우수사로 부임한지 2개월째였다.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의 기세에 눌려 전함을 버리고, 수군 1만 여명을 해산시킨 상태였다. 뒤늦게 해상의 중요성을 깨닫고, 율포 만호 이영남을 보내서 이순신 장군에게 원병 요청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여수에서 5월 4일 새벽에 ,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46척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출발을 한다. 고성 소비포(고성 하일면)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통영 당포(산양면)에서 1박을 하였다.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을 거느리고 온 원균과 만나서 거제도 송미포(다대)에서 1박을 하고, 5월7일 송미포에서 출발하여 왜군이 머무르고 있는 천성, 가덕도로 향하던 중 오시(오전11시~오후1시경)경, 조선수군이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 장군이 타고 있던 전방의 척후선으로 부터 옥포만에서 30여척의 왜선들이 정박을 하고 분탕질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조선 수군들과 이순신 장군은 양지암을 돌아 지금의 대우조선소가 위치한 옥포 만에서 해전을 치루었다. 단 1명의 전사자도 없이 왜선 30여척 중 26척을 격침시키고, 첫 승전을 거둔 곳이 바로 옥포 해전이었다. 이어서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하여 영등포(거제 장목면)를 거쳐 옛 진해 합포에서 5척을 격침 시키고, 다음날 적진포(통영시 광도면)에서 11척을 각각 격침시켰다. 옥포 해전은 옥포와 합포, 그리고 적진포 3군데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옥포 해전은 조선 수군의 첫 해전이자, 첫 승리이며, 임진왜란의 첫승리이기도 하였다. 옥포 해전의 첫 승리는 이후의 전황을 유리하게 전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왜군들의 통신과 서해 곡창지대로부터의 보급로를 해상에서 차단함으로써 왜군들의 육상 상륙과 진격을 저지시켰다. 또한, 남해안 일대의 재해권을 장악 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옥포대첩기념공원에 가면 왼쪽에는 사당이 있고 오른쪽에는 옥포대첩기념관이 있다.
옥포대첩기념관 입구에는 이순신장군의 정신이 쓰여 있었다.
멸사봉공의 정신 : 사욕을 버리고 공익을 위해 힘쓰다
창의와 개척정신 : 새로운 생각, 새로운 영역을 열어 나간다
유비무환의 정신 : 미리 준비하면 근심이 없다


이순신장군은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에 한성(서울) 건천동(지금의 서울 중구 을지로 18길 19)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제적인 빈곤으로 인해 어려서 외가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28세가 되던 1572년 8월 처음으로 무관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마사고로 낙방하였고 4년 뒤인 1576년 2월 비로소 식년무과에 합격하였다. 32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북방의 말단 수비장교로 시작된 이순신의 관직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이 없고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을 중시하여 상관들로부터 갖은 모함과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순신이 정읍현관을 거쳐 1591년 2월 유성룡의 추천으로 드디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은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수군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확충하였으며 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거북선과 판옥선, 지자와 현자총통 등의 무기를 제작하였다. 특히 조선의 돌격전함인 거북선은 적의 월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둔근 지붕에 못이 박혀 있고 전우좌우 사방에서 대포를 쏠 수 있어서 수많은 적선 사이에서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전선이었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하루 앞둔 1592년 4월 12일 이순신의 나중일기에는 나대용이 거북선 제작을 완료하고 거기서 지자와 현자총통의 시험 발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25)에 일본군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1598년(선조31)까지 계속되었던 일본의 침략전쟁을 말한다.
7년간 계속되었던 이 전쟁은 임진왜란으로 통칭되고 있으나 임진년(1592) 4월의 일본군 제1차 침입을 임진왜란, 정유년(1597)에 있었던 제2차 침입을 정유재란으로 부르기도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복야욕때문에 발생한 이 전쟁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육전에서 승리하여 서울을 침공한 후 평양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수군은 연전연승하여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호남지방을 방어함으로써 계사년(1593)에 이르러 일본군을 동남해안 일대로 후퇴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전황은 소강상태를 유지하였고 강화회담이 계속되었다. 정유년에 이르러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재침략을 하였는제 조.명 연합군은 반격하여 일본군을 다시 남해안으로 후퇴시켰다. 이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무술년(1598) 11월에 일본군이 퇴각하여 종료되었다.
조선은 이 전쟁기간동안 전 국토가 전쟁의 참패로 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입었으나 이순신 장군 등 용맹한 장수와 호국의지로 뭉친 의병의 활약으로 1598년 이 땅에서 왜구를 완전히 몰아냈다.
이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되었지만 아무리 어려운 위기상황에서도 국민들이 구국의 결의를 뭉치면 국난 극복이 가능하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었다.

왜군은 군사 20여만명을 이끌고 1592년 경상도 동래 앞바다에 무단 상륙한 왜적은 무방비 상태인 조선의 국토를 유린하여 20여일만에 한성까지 점령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임진왜란때 사용한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순신장군의 휘하 장군인 나대용장군이 중심이 되어 만든 거북선은 임진왜란 하루전에 완성되었다고 하니 놀랍다.
거북선을 즉면에서 바라본 내부모습이다.

전쟁의 시작과 멈춤을 북으로 알렸는데 북이 큰편이다.

수군의 모습인데 수병의 신발이 짚신인 것이 아쉽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신호연이다, 방패연인데 당시 연은 통신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방패연은 전술적 목적에 맞게 색깔과 문양, 모양에 따라 다양한 의미 즉, 전술적 통신수단, 정보 전달방식, 신호 체계 등을 담아 명령을 전달했다.
신호연은 모양과 색깔이 다른 45가지 연을 이용했다고 한다.

옥포대첩은 무방비 상태인 조선이 일본의 수군을 맞아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승전이다.
옥포만은 지형이 복잡한 거제도의 동쪽에 위치한 소규모 어항으로 임진왜란 이후 "구국의 고장"으로 자리했다.
당시 이순신을 위시한 우리 수군이 옥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은 장비나 실전 경험의 우수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조정은 왜구에 대한 방비를 전혀 세우지 못한채 당파싸움으로 혼란스러웠으며 무기 또한 왜구의 조총에 대적할 만한 것이 조선에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 수군은 어려운 상황임에도 '나라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애국애족의 충무정신으로 일치단결하여 전투에 임하였던 것이다.
특히, 옥포대첩은 왜군의 통신 및 보급로를 차단해 왜군의 육상전진을 저지했으며 아군의 사기진작에도 기여한 바다 크다.


양지암에 왜군 초소가 있어 옥포만 진입이 어려웠다. 옥포해전이 일어나는 당신 양지암 앞 바다에 해무로 인해 우리 수군의 진입을 왜군 초병이 늦게 발견하였다고 한다.
옥포 해전의 승리가 가능했던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양지암조각공원이 있다.




이순신장군이 수군들의 훈련하는 곳을 시찰하고 있는 그림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진중생활을 기록한 일기로서 전투 출동상황, 부하장군의 보고내용, 장계를 올린 일, 어머님과 가족을 걱정하는 일, 군율을 어긴 부하 장수를 처벌한 일, 공문발송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국보 76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중한 문화재이다.
아울러 16세기 말 동아시아 각 국가간의 갈등과 패권 경쟁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세계사적 사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6월 18일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옥포대첩기념공원 기념비 아래에는 옥포루 정자가 있다.


옥포대첩기념공원 오른쪽 언덕에 있는 기념비이다.
높이는 30m 이며 참배단이 있다. 이 기념비는 옥포만을 바라보고 있다.


옥포대첩기념공원 오른쪽 언덕에는 기념비가버 있다



거제 옥포대첩기념공원 왼쪽에는 영정을 모신 사원이 있고 오른쪽에는 옥포대첩기념관이 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첫 승전한 옥포해전을 기념하고 충무공 정신을 후세에 길이 계승하기 위해 유서 깊은 옥포만이 내려다 보이는 옥포동 산1번지 일대에 33,037평 규모로 조성한 기념공원이다. 1991년 12월에 기공식을 가지고 높이 30m의 기념탑과 참배단, 옥포루, 팔각정, 전시관 등을 건립해 1996년 6월에 준공하였다. 옥포루에 오르면 정면으로 보이는 옥포만의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다.
옥포대첩은 임진왜란의 첫 승리여서 큰 의미가 있다.
남해안은 진도에서부터 이곳 거제도까지 이순신장군의 발자취들이 남아 있다.
더 많은 동영상을 원하시면 유튜브 검색 "리차드박"
https://www.youtube.com/channel/UCIri0qOtRDddIxmp9Nx8xLA
주소 : 경상남도 거제시 팔랑포2길 87 (옥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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